[박상설의 자연 속으로] 산을 좋아하던 마라토너 김태형 박사
재미동포 출신의 김태형 의학박사를 떠올리며
‘고니’는 백조(白鳥, a swan)이다. 그 유명한 ‘차이코프스키’의 발레 음악 ‘백조의 호수’. 러시아에 널리 알려진 전설을 음악으로 재구성한 것이 ‘백조의 호수’이다. 우리나라 나무꾼과 선녀와 흡사한 스토리이다. 이 작품은 독일의 동화 작가 ‘무제우스’의 글에서 영감을 얻어 각색하였다고 한다.
백조를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고 한다. 닭 무리 가운데 한 마리의 고고한 황새처럼, 평범한 사람들 속에 한 사람의 뛰어난 인물이 섞여 있다는 晋書의 글이다. 白鳥는 새 중 극락조이다. 일본의 호구가이도(北海道)의 굿샤로(屈斜路) 호수와, 캐나다의 Lake Louise의 물안개 자욱한 호숫가를 미끄러지듯 노닐던 ‘고니’의 모습을 나는 잊지 못한다.
청아한 ‘고니’, 그가 바로 김태형 교수이다. 별명을 ‘선비’ 또는 ‘원님’으로 할까도 생각해 보았으나, 너무 진부하고 구티 나는 느낌이여서 ‘고니’로 했다.
의사 아닌 ‘고니’··· 새벽에 무작정 무념으로 달리는 ‘Forest Gump’, 심장병 어린이를 위한 목표의식을 갖고 뛰는 근성의 사나이. 산과 여행을 사랑하며 인류의 평화를 염원하는 자유인.
그의 인성을 훔쳐보며 견일지십見一知十(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으로 그와 머물렀던 자리를 떠올리며 애드럽게 더듬어 나간다.
그는 본성이 과묵하다. 말하기 보다는 듣는 쪽에 무게를 둔다. 속이 깊어 함부로 말 하지 아니한다. 그는 이 評傳을 읽으면서도 무척이나 수줍어하며 거북해 할 것이다. 어색해하는 그 낮음과 낯설어하는 그 어디엔가 있을 그의 반쪽을 만나고 싶다.
‘고니’는 냉정한 기운이 흐르면서도 모든 것을 감싸는 울림이 있다. 그의 굳건한 고집이 말수를 걸렀다. 그의 말은 맑은 계곡물 같기도 하고 호수 같기도 하다. 듣는 사람에게 잔잔한 파도로 다가온다.
‘고니’를 처음 만난 것은 2003년 여름이었으니, 벌서 10년의 세월이 훌쩍 넘었다. 그때 연세대학의 남재현교수 부부와 공주대 교수부부, 그리고 김태형 교수 부부를 청평의 아파트(등산 베이스캠프)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교수 부부들 일행과 안상길 사장, 그리고 나를 포함한 8명이, 베이스 캠프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산행을 했다.
그때 내 나이는 76세이고 ‘고니’는 환갑을 넘긴 나이에 아산병원의 소아과 진료실장 교수로 무척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다.
우리 일행 말고는 산에 오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호젓한 가평의 가덕산을 올랐다. 사람의 키를 훌쩍 넘는 이슬에 젖은 풋풋한 풀밭을 스릴을 느끼며 헤쳐 나갔다. 꿈속 같은 풍경은 우리의 걸음을 간간이 멈추게 하였고, 향기가 물씬 풍기는 하느작거리는 들꽃을 허리 굽혀 들여다보며 좋아서 어찌할 줄 몰라 했다.
마음을 끌어들이는 그 야생 풀밭 능선은 적막한 쉼터였다.
상아탑에 파묻혀 학문과 연구에 시달리는 그들은 이 싱그러운 산행 길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신록에 쌓인 조붓한 산길의 걸음마다에는 문명의 발길이 닿지 않은 우리만의 족적을 남겨갔다.
그 발길은 우리에게는 그저 걷기였지만, 매일 아침마다 뛰는 ‘고니’에게 만은 빨리 달릴 때의 시간과는 전혀 다른, 느림의 시간을 만끽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천천히 걷는 여유로움의 타임머신을 타고, 30년 전으로 돌아가 자신이 지내온 추억의 리얼리즘에 잠겼으리라.
그는 산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마라토너이다.
오르내리는 길은 모두 같은 길로 이어져있지만 모두 혼자로 걷는다. 너무나 범속한 일상에서 너와 나 사이의 경계가 모호했던 우리는 이제 서로 다른 나로서 홀로이다. 숲은 우리에게 ‘같이 또 따로’의 음유를 넌지시 알려준다.
‘고니’는 말한다. ‘삶’이 ‘마라톤’이며 ‘마라톤’이 삶이라고. 그는 ‘마라톤’을 통해 세상의 허무와 무상을 보아버린 우리들의 삶의 뜻을 마라톤 레이스에 묻어 연민의 자국을 남겨왔다. 그의 뜀박질은 이렇다 할 약속은 없지만 그 속내는 자연과 같이 하는 삶의 길이다.
‘고니’는 마라톤과 텃밭가구기, 산, 그리고 여행없이는 살수 없는 중독자가 되어 오늘도 뛰며 사유한다. 그는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자신과 산과 마라톤과 일과 삶에 어긋남이 없는 총체적 삶의 요람을 향하여 온 정열을 다하여 살아 왔고 또한 그렇게 나아갈 것이다.
‘고니’는 의연하고 잘생겼다. 그의 외양은 날카로우면서 부드럽고 꽉 찬듯 여유롭다. 의연하다는 것은 의연(依然)이 아니라 ‘의연(毅然)’의 뜻이다. 의연(毅然)이란 의지가 굳고 끄떡없다는 뜻이다.
얼핏 보기에는 냉정한 눈빛이지만 시간을 두고 보면 은연중에 사람을 끌어당긴다. 그의 말은 언제나 정곡을 찌른다. 가끔 신명이 나면 사안의 본질을 꿰뚫는 논리로 그의 과묵을 무색하게 한다. 그는 본시 내성적이지만 때를 골라 다혈질이 된다.
마음은 사슴이고 행동은 ‘고니’이다. 쉽게 나서지 않고 본질을 움직인다. 생각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아예 행동으로 일을 해치운다.
그는 엉뚱한 데가 있다. 일을 저지를 때는 앞뒤 돌아보지 않고 해치운다. 일이 잘못되면 그것으로 끝이다. 잘못된 그 오류마저 자기 것으로 소화한다. 그의 철통같은 자존심이 오류를 수용하고 자신을 방어한다. 따라서 그의 오류를 누군가가 지적하면 걷잡을 수 없는 파경이 일어난다. 그 오류는 이미 자기 선에서 자각폐기(自覺廢棄)된 고물딱지이기 때문이다. 그토록 자존심이 강하고 뒷책임을 감당해 낸다.
그는 지극히 선량하고 자연스러운 원초적인 인간욕구와 자기자존을 조화시켜 자신의 아성(牙城)을 지켜나간다. 그의 내면세계에는 어리광스러운 어린 마음이 자리한다.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린 순진함이 엿보인다. 그를 대하면 마음이 편해지고 그의 그늘 속에 있는 형세라고나 할까.
‘고니’는 만사에 무척 심중하다. 대충 대충 넘기는 법이 없다. 어찌나 마음 씀씀이가 섬세한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쩨쩨하게 따지고 신경날을 세워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게 아니라, 따질 것은 자신을 조아려 미리 계산해 놓고 시원스런 청사진을 펼친다.
반면에 예리한 지각으로 상대방을 꿰뚫는다. 그의 깊고 너그러운 도량과 냉철함에 사람들은 압도당한다. 그는 자신이 모르는 분야에 대해 항상 배우려 애쓰며 오늘도 그 길에 몰입한다.
그는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번개 같은 육감으로 가려낸다. ‘고니’는 그만의 고집이 대단하다. 자신의 소신을 향하여 매진한다. 자신에게서 우러나오는 영감에 늘 귀를 기울인다. 그는 늘 생각에 잠긴다. 때로는 혼자 있기를 좋아한다.
‘마라톤’은 자기와의 싸움이며 혼자이며 고독한 멋스러움이다. 그는 뛸 때 사유하며 끝내는 생각마저 소진한다. 그리하여 무아지경의 자신마저 버린다.
삶의 순간들을 철저하게 혼자인 ‘솔리튜드’로 승화한다. 인간이 상상치 못하는 곳까지··· 인생은 혼자 가는 것이다. 이런 치열한 생활관은 그만의 범상인(凡常人)을 만들었다.
그는 어려운 일이 닥쳐오면 당황하거나 경솔하게 대처하지 않고 믿지는 않지만 자연의 섭리와 운명에 맡긴다. 그는 컴퓨터와 생활을 같이하는 인간의 이성을 깨우는 지성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