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설의 자연 속으로] ‘학교 그만두라’ 했던 자유인의 외침

인생의 멘토, 백학태 선배 1주기를 맞아

내 인생의 큰 변화를 끼친 사람의 이름을 대라고 하면 단숨에 생각나는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그러나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는 분이 ‘백학태’ 선배다. 그는 나의 ‘멘토’이다. 그 선배는 지난해 6월20일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백 선배는 가족뿐 아니라 가까운 지인에게도 화장해 납골당 만들지 말고 가루로 산에 뿌리라고 유언했다. 그 유언에 따라 그날 밤 8시 반, 땅거미 질 무렵 태백산 정상 언저리 수백 년 된 주목나무 군락지에 뿌려졌다.

내가 대학 2학년 때 난데없이 ‘백 선배’가 우리 집에 나타났다. 어렸을 때부터 가끔 이야기로만 듣던 그였다.

대뜸 나를 보고, 야··· 이놈아 네가 ‘상설’이냐? 네. 네가 한두 살 때?너를 업어준 형이다. 너, 나를 알아보겠느냐? 알 리가 없겠지, 하하하··· 너의 똥오줌을 받아준 형도 몰라보느냐··· 이 고얀 놈. 세월은 참으로 빠르구나···. (그의 고향은 평양이다. 연하의 사람에게는, 무조건 억센 평양도 사투리를 써가며 해라하는 것을 애정의 표시로 여겼다)

너 지금 몇 살이냐? 열아홉 살입니다. 학교는 다니느냐? 네. 무슨 학교 몇 학년이냐?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2학년입니다. 야, 이놈아! 당장 집어치워, 그걸 학교라고 다니느냐!! 그곳은 인간 공장이야, 규격인간 만드는 공장이야! 사내놈이 호탕하고 방탕한 꿈을 가져야지!

학교를 그만두라고 하는 그의 말에 경악하면서, 한편으로는 내가 숨겨놓은 울분을 대신 터트려주는 듯한, 야릇한 쾌감이 번개처럼 스쳤다.

그는 첫눈에 역마살이 낀 ‘이태백’, ‘강태공’, ‘김삿갓’ 이었고,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이었다. 백 선배의 첫 인상은 삭막했다. 말에 주어와 술어만 있을 뿐 형용사나 부사 따위는 없었다. 단도직입식으로 요점만 말할 뿐이었다. 그가 나에게 물은 몇 마디에 나는 꼼짝없이 감전됐다.

내가 지금까지 겪어 온 다른 사람들의 말은 한결 같이 듣기 좋게만 말하는 생명 없는 맥 빠진 쓰레기 뿐이였다. 그런데 천둥 벼락 치듯 ‘학교를 그만두라! 그 학교는 규격인간을 만드는 공장’ 이라고 단정하는 외침에 겁부터 났다.

그러면서도 왠지 오래 묵은 체증이 확 뚫리는 듯 통쾌해지면서 내가 본 모든 어른과 선생들은 모두 가짜로 보였다. 심지어는 나의 부모까지도 맥 빠진 겁쟁이로 여겨졌다. 난생 처음으로 열불을 확확 토해내는 진짜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다.

백 선배는 늘 이 사회에 대해 시비를 거는 재미로 살았다. 그리하여 자신을 뒤집어 늘 우리 주변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하였다.

이 세상을 그대로 따뜻하고 긍정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보는 사람들 때문에 이 세상이 점점 더 망가져 가고 있다고 개탄했다. 가정이나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순들에 대해 눈을 감으려드는 기득권자와 부모들의 방관이 한심하다고 했다. 그들은 삶의 현실을 방기(放棄)하는 비겁자라고 꾸짖었다.

기억에 남는 백 선배 이야기. 일본시대 때인, 나의 중학교 시절 나의 부모는 가끔 ‘학태’가 전쟁 중에 죽었나? 살았나? 지금쯤 어데서 무엇을 하고 지내나? 하며, 무척 보고 싶다고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가끔 엿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누구인지 기억에 없었다.

백 선배의 고향은 평양이었고 우리 집은 춘천이었는데, 나의 아버지와 백 선배 아버지와의 친분관계로 백 선배는 춘천고등학교(당시에는 춘천고보)로 유학 와서 우리 집에 유숙하며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어렸을 때?평양 집에서 백 선배는?외국 선교사와의 친분 관계로?자연스럽게?서구문화와 영어를 익히게 되었다고도 들었다.

학생 시절에는 기질이 활달하고 스포츠에 능숙해 테니스, 스키, 수영, 스케이트에 특출하였고 전국 학생 스케이트 대회에서 일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 당시 일본 학생을 포함한 조선 전체 학생 스케이트 대회에서 금상을 받았다는 것은 대단한 기록이다.

그 당시 시대상은 일본이 중국을 침공하는 지나사변(支那事變)이라는 전쟁이 한창일 때다. 백 선배는 일본 군대 징집을 피하기 위해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중국으로 갔다.

일본 점령지는 일본군정하에 있었기 때문에 백 선배는 요령껏 중국 관리로 취업해 2차대전 종전 때까지 중국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겪었다. 남자로 태어나 젊은 날에 정처없이 싸다닌 방랑생활이 그를 자유롭게 하였으리라.

그는 술독에 빠져 있으면서도 세계문학전집을 늘 가까이 했다. 붓글씨의 대가로 한시를 창작하며 세월을 넓게 관조하는 낚시 취향의 프로였다. 90세 가까이 테니스를 쳤고, 내가 인사차 찾아가면 늘 세계역사책과 영어책이 머리맡에 놓여 있었던 게 엊그제 같다.

젊은 날에 막무가내로 방종하는 선배를 보며 나의 넋은 자유로웠다. 선배가 거나하게 취하면 곧잘 휘청휘청 거리며 나와 서로 엉켜, 어깨동무 친구가 돼 알 수 없는 콧노래를 중얼거렸다. 이럴 땐 세상이 모두 우리 두 사람만의 것이었다.

통 큰 선배를 지탱한 졸부는 행복에 겨워 그 품에서 훈훈하고 아늑한 느낌에 남몰래 눈물 짓곤 했다.

어떤 봄날 초저녁에 해장국을 마치고,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기 위해 그때는 변두리 농촌이었던 화곡동 논둑을 찾아, 밤늦도록 이슬에 젖어 가며 눅눅한 적막에 취하기도 했다.

개구리는 사람발자국 소리가 멀리서 울려도 용하게 알아차리고, 일제히 소리를 멈춘다. 그래 백 선배는 발을 쿵쿵 울리며 “상설아 내가 진시왕이다. 엎드려라!”하며 깔깔댔다.

어느 가을날, 영종도 억새밭에 텐트를 치고 바람에 흔들리는 풀과 나무 사이의 달빛을 맞으며, 우리의 귀를 너무 믿지 말자, 풀벌레 소리에 호들갑 떨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50년이나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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