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설의 자연 속으로] 완벽하게 빈, 나만의 시간
여행은 마음에서 시작된다···인천 ‘신도’에서 보낸?1박2일
봄기운에 밀려, 긴 겨울 내내 풀리지 않는 숙제를 핑계 삼아, 만사를 접고 텐트를 짊어 메고 서해바다 인천의 섬, ‘신도’을 찾았다.
나는 늘 혼자이지만, 가끔은 더 완벽하게 고립된 빈 시간이 좋다. 오늘 하루는 없는 날··· 나를 벗어나 둥지를 튼다. 그 캠프는 집이 아니라 ‘텐트’이다. 詩같은 바닷가의 소꿉놀이터. 산속도 좋지만, 외딴 섬에 들어, 하룻밤?한번 휘 돌아 본다.
깊은 곳에 숨겨진 조각난 나, 다 만들지 못한 나를 뒤집어 본다. 어느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황혼을 갈무리한다. 갈무리는 결코 은둔이나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삶과 부딪혀 치열하고 신명나는 공격적인 삶을 말한다. 넓고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몇 번이고 기지개를 펴며 짓 눌렸던 삶의 무게를 쓰러트린다.
넘어지는 노을 밟고 온 바람. 세차게 텐트를 후려친다. 어둠이 곧 다가온다. 얼룩진 생애가 내게 말한다. 혼자일 때 들리는 그 소리… 보다 진하게 스며든다. 이제 떨치지 못한 꿈을 마구 버리는 시간.
노을의 먼 그림자 따라 짙은 안개 뭉게뭉게 춤추며, 캠프를 가만 가만 에워싸고… 묵고 가라고, 묵고 가라고 한다.
분명한 건 하나도 없다. 아무도 없는 갯벌 언저리 해변에 버려졌다. 이 해변을 버릴 곳 없어, 이른 아침 도망쳐야겠다.
나에게 무엇이 큰 문제냐고? 이제 더 묻지 마라. 산과 바다와 바람이 시키는 대로 간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고요한 밤. 하룻밤으로는 부족한 하얀 밤… 넋을 잃고 지새운다. 왠지 아픔과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는 허허로움. 한시도 긴장의 끈 놓지 못하고. 애환(哀歡)에 얽매인 나. 그러나 세상을 탐험하며 내 꿈을 찾아가는 박진감 넘치는 전쟁을 사랑한다.
돌아보면 파도처럼 출렁이며 살아온 길. 우리는 살기 위해 얼마나 처절하게 몸부림쳤던가?
세상에는 길도 많지만, 오고 싶어 걸어온 길, 되돌아본다. 잡초 뿌리처럼 질긴 외고집 말고는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그래도 가끔은 잊고 싶은 것들이 다시 나타나 나를 노린다.
한갓 인간의 우울쯤이야…
섬은 길이 4km의 ‘신도’, 3km의 ‘시도’, 1.5km의 ‘모도’, 세 개 섬이 연륙교로 연결되어 옹기종기 서쪽으로 떠있다. 섬에는 작은 버스 한 대가, 한 시간 간격으로 세 개의 섬을 두루 돌아다닌다. 이 섬의 평화로움은 섬을 지키는 버스가 마을사람들과 친구 되어, 바다를 끼고 느리게 굴러왔다 굴러가는 한가로움이다.
그간의 막연한 불안들이, 섬을 한 바퀴 돌아보는 동안 가신듯 묘연해졌다. 늘 걷다보니 세월이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숨 쉰다는 것만도 고맙다. 한갓 인간의 우울쯤이야… 문득 ‘숨과의 헤어짐’을 풀이할 언어를 찾지 못한다. 깨어 있던 것들이 저물듯 숨이 멈추면 모든 흔적마저 지운다.
알맞게 흔들리는 차창가에서, 주름졌던 세월을 펴본다. 내가 죽인 시간들을 알량한 자존심이 덮어준다. 버스에는 단 세 사람, 눈길 주는 사람 아무도 없다. 한가로운 외딴 섬, 봄볕에 졸고 있다. 여행은 이런 맛으로 하는가 보다.
짐을 포구에 잠시 맡기고, 바로 구봉산(178m)을 올랐다. 산은 높지 않으나 산의 길이가 4km여서, 섬을 한 바퀴 종주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빈 가슴 열어놓은 혼자의 길. 군락을 이룬 진달래, 혼자의 나를 본다. 나에게 왜 힘이 솟는지, 새싹들에게 귀 대고 묻고 싶다. 늘 탱탱한 긴장 속에 열불만 펼쳐온 길. 이제는 삭으려나? 어림없는 소리인가?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고 싶다.
부풀린 세상이기에, 끌어안아야 할 사연보다 버려야 할 사연들이 더 많아, 생애를 소박한 삶으로 압축한다. 생활의 어려움보다 더 심오한 다큐의 정신으로, 늙은 승부사의 집념 하나로 생을 가벼운 놀이로 바꿔야겠다.
나무는 제 스스로 자연성만으로도 위대한데, 인간도 일상 속에 살아 피어나는 자연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