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설의 자연 속으로] 고비사막, 알래스카, 그리고 뉴욕 할렘가

몽골 고비사막, 2016년 7월 촬영 <장지룡 홀리데이스 대표 제공>

이제 한 달만 견디면 곧 가을이다. 환상의 9~10월이 되면 철원의 DMZ언저리 평원에 울려 퍼질 풀벌레 선율과 기러기의 페스티벌 캠핑을 펼쳐 관객은 나 홀로 몇날을 지낼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나에게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 도시 속 환상을 그리는 마음으로. 나는 좋았던 곳은 너무 많아 이야기를 다 할 수 없고, 그 좋았던 곳은 알고 보니 이제는 모두 시들해졌고, 진짜 좋았던 곳은 세 군데라고 말한다.

1)미국 서부사막과 고비사막.

2)북위 50도 이상의 캐나다 로키와 알래스카의 외로운 자작나무숲과 백야, 그리고 그 웅장한 빙하와 유콘강과 호수가에서의 캠핑.

3)정처 없이 떠도는 빈한한 이들과의 만남, 그들과의 노숙.

여행은 때로는 거지가 되는 것이다. 여행 중에 나는 떠돌이들과 때때로 한패가 되기도 했다. 천덕꾸러기로 나뒹굴어봐야 안다. 총탄이 난무하고 무섭다는 뉴욕의 할렘가에서 단돈 2달러와 빵을 갖고 3일간 그 패거리와 같이 지내기도 했다. 인도에서는 거지들과 거리에서 노숙하며 진짜 사람들을 만났다. 늘 똑같은 나날을 꼬박꼬박 사는 것을 부끄러이 여긴다.

어찌하다 여기까지 흘러왔는지? 또 어디로 떠나가야 하는 것인지? 구속이 자유이다. 여행은 가슴을 저리는 것이다. 덧없음을 겪는 것이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부담을 갖지 말자. 나의 여행은 저절로 되어진 것들, 제 스스로 그러한 것들을 찾아다니는 멍청이다. 말 못하고 자연생태계에 버려져 자생하는 것만을 쫓아 마음을 풀어 노는 표류인생이다.

가능한 기능적 문명을 뒤로 하고 자연의 향기와 듬뿍 놀 일이다. 숲과 사막에 누워 느끼고 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열 번 배우고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만이라도 해 보면 안다. 교실에서 감성을 배웠다는 자유인을 못 봤다. 차로 그냥 지나치는 것과 머무는 것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사막의 무의미한 것들이 가진 힘은 무섭다. 사막의 외로운 황홀함에 우주만큼이나 헤아리기 어려운 나의 내면세계는 이유 없이 사뿐해졌다. 사막에게 나는 투항하며 중얼댔다, 아무도 없는 나 혼자여야 한다고···. 인생의 총체적 뜻은 막막하고 하잘 것 없는 모래 들판에 있었다.

고비사막 지평에서 마지막을 고하는 석양은 허무와 두려움과 비통한 아름다움이었다. 미국 서부의 네바다, 유타, 아리조나, 뉴멕시코 등 사막에서 여러 날을 보냈다. 미국대륙횡단도 기차로 오토캠핑으로 네 차례나 했다. 한여름 낮기온은 섭씨 50도에 육박하는 열사의 광막한 땅이지만 해가 지면 시원해지고 한밤중에는 한기마저 든다.

황량한 사막은 공허하고 아득하다. 습기가 없어 밤에는 쾌적해 더 없이 상쾌하다. 밤이 깊을수록 별이 찬란하게 손에 잡힐?듯 마구 쏟아진다. 사막등산에서 나는 어이없이 당했다. 산이라야 불과 100m이내의 돌덩어리뿐이다. 그런데 걷다보니 지평에서 안보이던 거대한 계곡이 거짓말같이 아득하다. 그 깊이가 무려 1000m를 넘는다.

계곡 밑으로 산이 꽂혀있는 게 아닌가. 이 지옥같은 역 산행을 섭씨 50도의 땡볕을 뚫고 해내야했다. 나를 몰아세우는 황량한 사막바람에 맞선 도전은 두고두고 사막을 사랑하게 만들었다. 로키의 산행길은 거의가 수직길을 피하고 지그재그로 만들어졌다. 빨리 오르는 게 아니라 천천히 자연을 음미하며 걷게 돼 있다. 어딜 가나 산이 험악해서겠지만 트레일 곳곳에 ‘길을 벗어나지 말라(stay at trail)’는 안내판이 있다.

걷는 것이 아니라 웅장한 빙하의 경관에 압도당해 마냥 서 있어야 할 판이다. 대평원의 자작나무숲, 그리고 하늘로 치솟은 숲에 둘러싸인 그 수많은 호수들···. 호숫가에서의 모닥불과 진한 커피 향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도도히 흐르는 흙탕물의 유콘강에는 천지를 뒤흔들며 거대한 나무들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여름빛이 저물며 강의 힘찬 울음소리가 거세지자 북극의 한지에서만 사는 아주 작은 모기떼의 습격은 가히 살인적 이였다. 그래 미리 준비해간 모기장을 해먹에 달아매고 유유히 북방하늘 아래서의 ‘한여름 밤의 꿈’은 더위는 멀지 감치 물러가고 때 아닌 가을을 즐겼다. 자정이 넘었는데도 밤하늘은 초저녁처럼 환한 백야.

빙하를 이고 있는 산위 하늘에 그 찬란한 오로라가 형형색색의 빛을 띠고, 휘~ 하는 우주의 울림소리를 내며 화살처럼 쏜살 같이 퍼져 백야를 덮쳐 사라진다. 어찌 저리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 내가 있는 곳조차 알 길이 없다. 떨고 있었다. 호수가 전나무사이의 풀숲에 텐트를 치고 백야의 밤을 하얗게 보내며 오로라를 기다렸다. 알래스카의 밤은 꿈결 같은 한 폭의 그림으로 내 책상머리에 늘 놓여있다. 나는 그곳에 다시 가야한다. 꼭 가야한다.

사막과 북극 그리고 떠도는 사람들과 한때를 같이하고 싶은 마음은, 허허롭고 광막한 버려진 곳에서 홀로 나를 버리는 적막의 자유가 있기 때문인 것을 고백한다. 규제 대상에서 벗어났을 때 또는 인위적인 것이나 화려한 대상에서 제외됐을 때 나는 살고 있는 것이다. 소박한 것과 맞닥트려 은유적 상징으로 새로운 지평을 연다.

처음부터 극지를 떠돈 것은 나를 버리러 간 것이지 여행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도 엄두도 안 나는 무서운 길을 마구 쏘다녔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만용은 선험적 기억에만 의지하지 않고 늘 새로운 것에 모험을 걸어 흥미를 유발하는 호기이다.

눈앞의 절벽을 두려워하지 않은 자신이 가엽기까지 했다. 버려진 들녘마다 이름 모를 꽃들이 파도치는 북극에 소진되고 싶었다. 기억 없는 기쁨, 기억나지 않는 슬픔, 후회할 수없는 깨달음의 희열 등 모든 발자취가 꿈의 행로였다.

버려진 것들은 너무 아름다웠다. 저절로 된 것들 제 스스로 그러한 것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허전하고 쓸쓸했다. 자연에는 디자인이 없다. 인간이 개입할 수없는 심플함이 전부이다. 자연이 하는 짓은 모두 옳았다.

짧지 않은 여로를 사막에 눕고 빙하를 탐험하는 여정은 험난했지만,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오고간 길은 여한이 없다. 길 위에서 마주친 헐벗고 가난한 그들··· 이 순간에도 길 위를 헤매고 있을 그 빈한하고 선량한 사람들 아….

너무 외롭거나 아프지 마라! 세상 끝에 걸친 그대들의 고통, 그리고 나의 방황도 언젠가 끝이 날 것이다. 따뜻한 말 한 마디 전해주지 못하는 나를 원망하며 나만을 감싸는 삶이 비열하고 비통하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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