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설의 자연 속으로] 왜 혼자 사냐건 웃지요

3평 이 공간이 박상설 사람과 자연 전문기자에겐 가장 아늑한 보금자리다.


26년 살림 경력… 물김치, 식혜 담궈 먹어

내가 혼자 산다는 것을 알고 남들이 제일 궁금해 하는 건 식사와 빨래 등 살림문제인 것 같다. 그 연세에 혼자 사세요? 그럼 식사는요? 외롭지 않으세요? 날은 추운데 병이라도 나면 어쩌려고요? 왜 자식 며느리는요? 누구든 이렇게 묻는다.

때로는 밥보다는 반찬 걱정을 더 한다. 그럼 나는 속으로 화를 내며 왜 밥을 못 해먹느냐고 자랑삼아 뻗대본다. 의심 많은 사람은 말 못할 사정이라도 있지 않나 하는 눈치다. 그럼 나는 한술 더 떠 이 나이에 산에도 가고, 책도 읽고 수시로 글도 써서 e-mail을 주고받는다고 기염을 토한다.

내 말은 소귀에 경 읽기. ‘그래도 그렇지요’로 김을 뺀다. 내가 제일 혐오하는 말은 ‘그래도 그렇지요’인데, 용하게도 알아차리고 내 속을 뒤집어 놓는다.

더 파고드는 사람에게는 한방에 날려 보내려고, 영하 15도 숲속에서 오토캠핑 한다고 제압해 본다. 그러면 ‘추운겨울에 동사하려고 눈 위에서 자느냐?’며, 감탄하는 게 아니라 나에게 훈계한다. 절대상종 못할 냉혈 동물쯤으로 여기는 기색이 분명하다.

그러니 대화는 끊어지고 남남이 된다. 그래도 헤어질 때는 ‘젊은이보다 더 젊고 용감하다’며 칭찬한다. 이럴 때 나는 치옹(痴翁)의 한마디를 떠올린다. ‘늙어서 젊은이와 거리가 생기는 것은, 세대 차이가 아니라, 늙기 전의 나를 잃음이다.’

노래방, 찜질방, TV, 담배, 술 등 신변잡기를 일체 안하는 나는 이단자로 몰린다. 그래서 나는 산에 갈 때나, 안 갈 때나 늘 산에 있게 된다.

26년간 혼자 살림을 꾸려오다 보니, 이제는 프로 전업주부가 됐다. 밥하고 반찬 하는 건 손에 익어 아무 문제가 없다. 나의 까다로운 비위는, 나 아니면 맞출 수가 없다. 그렇다고 진수성찬에 비싼 음식을 탐내는 게 아니라 내 입에 맞는 수수하고 값싼 음식에 익숙하다.

내가 좋아하는 반찬은 내가 직접 만든다. 물김치, 식혜는 일년 내내 떨어지지 않고 담궈 먹는다. 좋아하는 반찬은 아욱국, 배추꼬리를 넣은 배추 토장국, 날파와 양파 그리고 오이지이다. 외식은 거의 안 하고 산행이나 여행할 때 고작 막국수나 칼국수로 때운다. 그렇게도 다들 좋아하는 회도 거들떠 보지 않는다.

나의 살림은 내가 즐겨서 하는 편인데 책 읽고 글 쓰는 일만은 참으로 고역스럽다. 원래 기계공학을 공부한 공돌이여서 인문학과 글 쓰는 데는 소질이 없다. 1년 반 전부터 나빠진 눈 때문에 힘에 부치는 글을 겨우 쓴다.

불꽃처럼 살다간 여인 전혜린

나는 나의 힘이 닿지 않는 광막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가끔 작은 텐트 안에 우주를 품는다. 고요하고 어슴푸레한 작은 공간에 들면 흐뭇하다. 피할 수 없는 가난마저 두렵지 않은 생각이 들며 ‘센티멘털’한 작은 애수에 젖는다. 서리같이 찬 이성이 격류에서 호수로 세속과 멀어져간다. 산다는 것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럴 때 엉뚱하게도 ‘전혜린’을 떠 올린다. 불꽃처럼 살다간 여인, 흰 장미 한 송이를 좋아했던 전혜린···.

그는 곧잘 이렇게 독백했다. “산다는 일, 호흡하고 말하고 미소할 수 있다는 일 귀중한 일이다.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닌가. 지금 나는 아주 작은 것으로 만족한다.”

그는 뮌헨의 우수를 사랑했다. “서울에서 뮌헨. 회색우수와 레몬빛 가스등. 슈바빙. 그 자유와 낭만의 예술인촌. 외로운 여름날의 전설”

검은 머플러, 우수에 서린 눈동자로 그 날카롭고도 매혹적인 에스프리를 쉴 새 없이 말하던 전혜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 이 두 권의 책을 나는 늘 텐트에 간직한다.

그는 31세 나이인 1965년 1월10일 현해탄 관부연락선 배위에서 거친 파도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얼마까지 살아야 만족해할까? 오래 사는 것이 문제인가?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한가? 드높은 하늘이 맑고 시원하다. 저 창공과 숲을 보고 자연의 사치를 마음껏 꿈꾼다. 자연은 사람을 홀리게 하지 않고 끌어들이는 푸른 나무와도 같다.

어제도 산에 갔다. 그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는 기쁨을 무엇으로 사랴. 지난날의 즐거운 회상과 미래의 아름다운 희망은 언제나 산에 있다. 세속에 물들지 않은 진솔한 여백(餘白)과 이완(弛緩)의 시간이 너무 넘치지 않게 산에 흐른다.

상업주의 거품과 포퓰리즘에 물들지 않게 하고, 조악하고 이상스런 현혹에서 구해주는 산과 텐트와 농원을 나는 사랑한다. 인적 그친 골자기에 물소리와 바람소리 새소리···. 거리낌 하나도 없이 세상 사람들과 나와 서로 다르다는 것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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