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설의 자연 속으로] 가던 길 멈춰 서서

나뭇잎 하나 텐트 위로 떨어지고

조붓한 산길을 뚜벅뚜벅 걸었다. 걷고 싶은 길이 있다. 외로운 산모퉁이를 지나 꾸불꾸불 심심하고 무료한 길을 걷는다. 과거와 나 사이를 낙서질 하며 장난친다. 누군가가 왜 ‘이런 길을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몹시 불편하다.

‘왜’라는 물음 속에는 나의 속내를 알아차렸을 개연성이 높다. 길은 연민에 순응하는 싸움터이다. 노추(老醜)는 몸을 채찍해 가며 더 천연한 곳을 찾는다.

가을 산속에 들어 나를 본다. 산에 비친 나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나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대체로 꽃의 이름과 모양을 통해 그 꽃을 연상한다. 마찬가지로 세상만사를 이미 학습된 지식, 언어, 가치, 신념체계를 통해 해석한다. 선입견을 갖고 판단하거나 주관적 오류에 빠지거나 이성을 넘어선 신비한 영역으로 치부하기 쉽다. 심리학의 분석틀을 빌려 마음의 과학을 생각한다. ‘사유의 멈춤’ 즉 ‘자아 침묵’을 통한 시공의 실존 인식이다. 안으로 성근(誠勤)한 ‘고요’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다시 적는다. 생각하면 ‘환상’이고 즉 ‘감성의 왜곡’이고 그냥 바라보면 ‘자유’다. 즉 ‘기능’이 아니라 ‘의미’를 알게 된다. 무위(無爲) 자연을 근원으로 바라본다. 자연으로 돌아가자! 루소는 갈파했다.

가던 길 멈춰 서서 물들기 시작한 단풍잎을 만지작대며, 먼 능선을 쳐다보았다. 파란 가을하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짓눌렸던 무게가 풀린다. 이제 꿈 많던 어린날로 돌아간다.

‘도시여 안녕!’ 배낭 하나에 담아온 여행, 아무렇지도 않게 캠퍼가 됐다. <캠핑폐인>이라는 책이 있다. 폐인이 돼야 안다. 긴장 벗어던지고 ‘제로스트레스 캠프’를 펼친다. 나뭇잎 하나가 동그라니 텐트에 앉았다. 저 많은 나뭇잎 가운데 마지막까지 버틸 하나의 잎사귀가 궁금하다. 마지막 행상(行喪) 길로 떠나는 ‘바삭’ 소리를 마음에 담을 것이다.

노인은 박물관이 아니다

영혼의 정화와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게 하는 맑고 정갈한 야지는 우리나라 산촌에 널려 있다. 요즘은 들국화, 억새풀, 구절초, 갈대 등이 가을을 알리는 계절이다. 이 들꽃들은 외로운 여인네가 슬픔을 띠고, 스산하게 어른거리는 가을살결 같다. 곧 단풍이 온 산에 물들어 만추를 아쉬워 할 날이 멀지 않았다. 단풍잎 뚝뚝 떨어져 가을이 떠나는 날, 나의 외로운 그림자는 가는 가을 잡고 서성일 것이다.

내 나이 90세가 되어도 할 일이 있다. 자연이 있는 한 그곳이 일터이고 오락장이다. 아흔이 돼도 세상을 살기에 늦은 나이가 아니다. 나에게 세상은, 길 위에 있고, 걷기에 있고, 씨 뿌리고 밭 가꾸며 야생화 보듬고, 생명수업 하는 데 있다. 이런 현요(眩耀)한 이완(弛緩)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모든 것을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내 스스로 해내는데 있고, 흐르는 강물처럼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자연과 공생하는 존재방식을 개발하고 개선하는 일을 유일한 낙으로 삼는다. 상식을 깨부수고, 다양한 자유를 엮어내는 모더니티(modernity)한 문화구현을 말한다.

늙어가는 데는 별난 기술이 필요하다. 노인은 박물관이 아니다. 노인의 덕담을 말하지만 늘 갇힌 말만 하는 진부한 덕담은 공해다. 지성이 뻔뜩이고 앞서가는 스마트파워 행동으로 길이 되어주는 멘토를 후학들은 바란다. 깨져야 한다. 옛날만 답습하면 고인 물이 된다. 미래를 향해 활짝 열린 새로운 생활공간을 만들어내는 ‘벤처 인생’을 경영하는 것이다.

‘Home Sweet Home’의 성공은 즐긴다는 기분으로 마음의 짐을 내리는 데 있다. 애타게 권하는 내 목소리가 들리는가?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