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설의 자연 속으로] 러시아 ‘다차’, 독일 ‘클라인가르텐’, 일본 ‘시민농원’, 한국은?
행복 없는 삶은 무서운 형벌
우리는 세계 10위권의 수출국 반열에 올랐고, 1인당 국민소득도 2만 달러를 넘어섰다. 그런데 국민의 총 만족도(GNS)와 국민행복도(GHP)는 OECD 36개 국가 중 24위에 머물러 있다. 영국의 신경제재단(NFF)의 지난해 국가별 행복지수 조사에서 한국은 143개국 중 68위에 그쳤다. 히말라야 산자락에 위치한 작은 나라인 ‘부탄왕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2000달러에 불과하지만 국민행복지수는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국민의 97%가 행복하다고 답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우리는 경제성장은 이뤘지만 국민들이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불행한 처지에 놓여있다.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달성했다고 행복한 게 아니라 행복해야 성공한 것이다. 행복의 기준은 무엇인가? 남의 나라를 들여다보자.
러시아는 주말이 되면 주말농원인 다차(Dacha)로 향하는 차량으로 혼잡을 이룬다. 러시아에는 다차가 약 3200만 개소 있고, 인구는 1억3700만명이니 4~5명당 다차가 1개씩 있다. 대부분의 가정이 다차를 갖고 있는 셈이다. 국민들을 다른 생각을 못하도록 만든 통치 수단이 그 나라의 정치와 경제안정과 국민정서에 크게 기여했다. 투쟁으로 격렬했던 노동조합이 다차 생활로 와해됐다고 한다. 모스크바에서 2년간 유학하며 다차를 경험한 필자의 주말레저농원 멤버 이선옥씨는 “러시아 사람들은 주말에 다차에 와서 아이들과 텃밭에 농작물을 심고 가꾸며 이웃과 가족들이 어울려 야외 운동과 산책을 즐긴다”고 한다.
다차는 텃밭 90평 건물 9평이 기준이다. 다차 숲속에서 샤슬릭(숯불구이 꼬치)을 구워 먹으며 보드카에 취해 잠시 풀밭에 뒹굴며 졸기도 한다. 특이한 것은 책 한권을 들고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한가한 사색의 멋이라고 한다. 아마도 톨스토이나 차이코프스키 도스토옙스키의 인문학적 자연관이 국민정서로 승화된 감성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
무공해 채소와 과일을 자급자족하며 이웃과 나누어 먹고 남는 것은 시장에 팔아 생활에 보태 쓰는 소박한 삶이 몸에 배어 있다고 한다.
겨울에는 마당에 있는 작은 수영장의 얼음을 깨고 풍덩 빠졌다. 바냐(사우나)를 번갈아 드나들며 자작나무 잎가지로 몸을 때리며 전통적 북극곰 놀이를 즐긴다. 대학교수들도 학생들과 다차 생활을 하며 농산물 생산과 수확에 힘쓰고 가을 추수 때는 대학이 휴강까지 하기 때문에 오락·유흥가도 문을 닫아 한산해진다고 한다. 다차는 러시아인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온 국민의 정서적 고향으로 자리 잡았다.
독일의 주말 가족농원인 Klein garten(작은 농원)은 전국 회원 수 1200만 명, 동호회 1만5200개로 10가구당 1가구가 주말농장을 이용하고 있다. 한 구획 당 토지는 60~120평이고, 건물은 9평 미만으로 규제돼 있다. 실용적이고 소박한 독일문화를 잘 상징하고 있다. 개인소유보다는 회원제로 임대하는 형태가 많다. 임대료는 1구획 당 년 간 45유로(약 5만9000원)이며 협회비는 1구획 당 년 간 60유로(약 7만8000원)이다. 보험료 전기·수도료 등을 합하면 350유로(45만5000원)이다.
19세기 중반 이후 독일은 산업화에 따라 도시인구가 늘어 좁고 열악한?주거환경이 사람을 병들게 하는 주원인이라고 의사인 슈레버 박사가 주장해 사회운동으로 번져 주말농원이 번창해 나갔다. 어린이들의 건강과 정서를 위해 채소묘상을 만들어 어려서부터 농원 일을 체험시켜 어린이 놀이공간으로 발전시켰다.
일본은 체제 형 시민농원인 야치요쵸(八千代風)를 소규모로 계획, 개발하고 연이어 브라이엔 오오야-만족감을 느끼는 농원, 브루엔 야마토-꽃을 사랑하는 농원 등이 생겨났다. 1구획의 토지는 약 90평이고, 건물은 약 8평이다. 이용요금은 27만6000엔(연간)이다. 이런 시민농원 외에 일본인 들은 작고 예쁜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작은 집이나 아파트에서도 채소, 분재, 꽃, 야생화, 연못, 분수 등을 만들어 손질하며 즐긴다.
그리고 주말에는 작은 텃밭에서 또는 텃밭이 없으면 산야를 돌아다니며 야생화를 사랑하는 모임에 나가 사진도 찍고 활동한다. 그 활동의 규모는 전 국민의 80% 정도가 정서적 생활에 젖어있다. 일본의 야생화, 전원생활, 꽃 가꾸기, 채소류, 요리 등의 매거진발행 문화사업과 그 이벤트는 가히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정서문화의 꽃이다.
또 일본인은 지역공동체를 위해 노력하는 전통이 대단해 그 내용은 농민들과 유대를 깊이 하는 자연 사랑의 풍습이 몸에 배어 있다.
경제적 진보와 물질적 소유는 중요하다. 이는 삶을 크게 개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경제적 진보는 다른 목표들과 동시에 추구될 때만이 행복을 느끼게 된다는 조건이 요구된다. 즉 국민행복추구(GNH: Gross national happiness)가 최종 목표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질적 만능이 우리를 행복으로 바꿔놓지는 않는다.
우리나라는 혼란스러우면서도 어중간하게 질서가 잡혀 있는 나라이다. 혼란에 친숙해있으면서도 적당히 질서를 헤쳐 나가는 이해하기 어려운 암호 체계를 갖고 있다. 삶의 방식에 모종의 비합리적 질서가 있다.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다는 말을 많이 한다. 이게 문제이다. 우리 공동체가 붕괴 되지 않을 정도로 위태롭다. 이런 것이 사회를 어지러트리고 우리의 행복을 가로막는다. 도대체 이 비합리적인 질서 아닌 질서란 무엇인가?
이는 누구나 다 아는 일인데도 아무도 모른다. 개개인을 대하면 선량한데 몇 사람 모이면 엉뚱한 군중심리에 휩싸여 법질서와 미풍양속을 해치고 교양 없는 반사회적 일들을 저지른다. 전원생활과 자연을 통합한 인문학적 인성교육이 부족한 탓이리라. 감성어린 인성교육은 가정만이 해낼 수 있다. 여가생활을 바로 잡아야한다. 모든 습관은 정의나 윤리도덕의 가르침이 잘못된 게 아니라 무질서하게 노는 방법이 지문처럼 손에 배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업화·정보화 물결 속에 자신을 되돌아볼 기회가 없어지고 씨 뿌리고 밭 가꾸며 땀을 흘리는 노동선의 즐거운 자유정신을 멀리했다. 먹을거리와 돈만으로는 행복해질 수 없다. 오직 국민의 ‘총체적 행복’을 위해 용맹한 누군가가 나타나 깃발을 높이 쳐들고 과거 새마을 운동을 뛰어넘는 야심찬 역사전환의 전략적 국민운동이라도 해야하는 걸까. 세상은 나날이 변하는데 우리 가정의 모습은 그대로이다.
땀방울을 통한 자연스런 행복의 속삭임은 가족 안에 있다. 우리는 너무나 마음이 매말라 있다. 갈 길은 오직 자연, 즐겁게 살기위한 길도 역시 자연이다. 인생의 모든 문제를 원천 치유하는 체험 장, ‘주말레저농원’을 생활화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