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설의 자연 속으로] 애틋한 향수에 젖은 풀벌레 페스티벌

부산한 명절을 뒤로 하고 추석 전날? 4박5일간의 여정으로 최북단 휴전선 인근의 외로운 땅, 철원평야를 찾았다. 오토캠핑 장비와 송편, 포도, 감자, 고구마를? 준비했다. 들어간 비용은 유류값 4만원.

나는 일제강점기인 중학생 때, 경성역(서울역)에서 경원선 기차를 타고 철원~평강~상방~해금강~동해안을 끼고 양양으로 가는 기차여행에서 보았던 창밖 풍경을 잊지 못한다.? 철원에서 평강고원으로 이은 넓고 넓은 들녘풍경이 오랜 세월동안 가슴에 각인돼 있다. 그 후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북녘 땅을 바라보는 자의 옛 정취를 잊지 못해 허허롭게 자주 찾는다.

이 가을에 같이할 수 없는 K형! 45년 전 어떤 가을날, 한탄강변 들녘에서 K형은 드높은 파란 하늘의 뭉게구름을 바라보며 “상설아! 저 풀벌레 소리, 일렁이는 억새물결, 가을은 내게 형벌이로구나!”라고 독백했다. 이 세상을 향한 허무와 더없이 좋은 가을날을 그저 흘러 보내야만 하는 아쉬움이 열병이 되었으리라. 그때 내손에는 한줌의 억새풀이 쥐어져 있었다.

나에게 몇 밤의 노숙을 허락한 이 들녘은 인적 드문 청정무구의 철원 평야 한탄강변이다. 은빛의 억새풀 일렁이는 그리움의 추억, 들녘에 어스레 저무는 노을, 새벽녘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혼자서 바라보는 여심(旅心)은 쓸쓸하다.

그곳은 가을이 제일 먼저 찾아드는 최북단 DMZ, 외로운 적막한 땅이다. 들녘의 무성한 풀잎은 하루가 다르게 볕에 바래져 간다. 나부끼는 억새는 슬픔으로, 삭아가는 풀잎은 아픔으로 다가 온다. 찡한 가슴 이제 서야 내가 왜 혼자이어야 하는지를 안다. 여행을 하면 세상도 비켜가는 가보다.

자연·우주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데 인간은 옳음과 다름의 조각 맞추기 퍼즐게임에 여념이 없는 군상들인가? 나무 잎이 서서히 져 간다. 그 잎 하나하나 바람결에 날릴 때 나도 늙어 시들어져가는 노심(老心)을 그냥 바라보기만 한다. 남들에겐 목표가 있겠지만 나에겐 숨 쉬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혼자의 여정(旅情)이 쉼 없이 그런 비유로 알려준다.

쓸쓸한 휴전선은 하얀밤의 ‘카네기 홀’

사람들은 풀벌레를 그냥 지나친다. 지나친 것조차도 모른다. 인간의 문화와 경제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자연을 향해 좋다는 말을 자유롭게 한다.

어두워져가는 풀밭에 벌렁 누었다. 아무리 들어도 그들의 노래 말을 알 수 없다. 그냥 좋다. 놀랍게도 밤을 지새워 속삭인다. 새벽녘엔 그 소리 가냘프게··· 어딘가로 멀어져 간다.

쓸쓸한 휴전선은 하얀 밤의 ‘카네기 홀’이다. 작은 페스티벌의 입장료는 무료이고 꼭 텐트를 갖고 올 것. 작은 책 한권과 침낭을 잊지 말자.

마음껏 뒹굴고, 마음껏 꿈꾸고, 마음껏 희망하라! 만물이 삭아가는 계절이다. 애잔한 그 소리… 밤은 풀벌레 소리와 함께 깊어 간다. 어둠속 어디선가 ‘찌르르-찌르르’ ‘베짱-베짱’ ‘귀뚤-귀뚤’ ‘찌륵-찌륵’ 가슴을 파고든다.

누군가의 귀뚜라미 시를 떠올린다. ‘밤이면 나와 함께 우는 이도 있어 달이 밝으면 더 깊이깊이 숨어 듭니다. 오늘도 저 섬돌 뒤 내 슬픈 밤을 지켜야 합니다’

나비가 봄의 전령이라면 귀뚜라미는 가을의 친숙한 친구이다. 구슬픈 그 소리··· 그래서일까, 옛 시에는 외롭게 지내는 여인의 마음이나 고향을 떠난 나그네가 귀뚜라미 소리에 잠 못 이루는 초야에 묻혀 사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 한다. 깊어가는 가을 속에 그 애잔함 오랫동안 가슴 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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