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가을은 여행이며 직업이다. 이곳은 임진강 들녘 풀숲이다. 기러기는 추수가 끝날 무렵에 4000km의 먼 러시아에서 날아오는데 성미 급한 놈은 벌써 날아와 석양의 외로움을 한껏 더해준다. 기러기는 고향과 타향 두 곳으로 산다. 한국이 고향인지, 북국이 타향인지 나는 모른다. 다만 나는 가을의 기러기가 내 마음의 고향이다.
기러기는 낮에는 보기 드문데 아침저녁에는 영락없이 강가로 날아들었다 떠난다. 아침햇살을 받으며 날아드는 기러기 떼와 저녁 석양에 날아가는 질감은 완연히 다르다. 아침의 기러기는 힘차고, 저녁 무렵에 물든 수평선 너머 어디론가 떠나는 기러기는 애잔한 비수처럼 아득히 멀어져 간다.
밤은 흘러간다. 떠난 후에 쫒아온 가을 빗소리. 투 둑, 텐트를 적시는 그 소리 가슴 시리다. 가을과 도시는 기어코 나에게 텐트를 메게 했다. 어둠이 자욱하게 내린 억새풀 숲에 비가 내린다. 혼자의 밤이 더없이 작은 우주를 품게 해주었다.
다음날 산을 찾았다. 청정한 시원의 숲에 잠긴다. 심산의 질감이 은연히 스민다. 심오한 풍광들이 아슴푸레 저미어온다. 이 산속에 이런 곳도 있었네. 서서히 날이 저물어가며 산자락 들풀에 머금은 이슬이 랜턴 빛에 어른거리고, 간간이 끊겼다 이어지는 구슬픈 풀벌레소리 시름겹다.
달밤에 ‘자연의 사치 페스티벌’이 펼쳐진다. 관객은 나 홀로···. 달리는 구름사이로 스러져가는 달빛, 마냥 밤은 써늘하니 깊어간다. 더없이 흡족하고 고마운 밤이다. 일교차가 10도나 났다. 하룻밤사이 사계절을 겪으니 족하지 않은가. 사람들은 학습된 억지웃음으로 복이 오고 건강해진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자연에 부대끼며 사람과 자연과의 소통을 통해 마음이 편해지고 건강해진다고 여긴다. 기쁨의 여신이 허락한 이 밤은, 평생을 살아낸 모든 밤이 이 하룻밤을 위한 축제이다. 숲의 힘은 무섭다.
이 글을 읽는 독자여. 단 한번 만이라도, 만물이 쇠락해가는 이 가을밤에 홀로 나앉아, 밤을 지새워 우는 풀벌레와 친구가 되어 새벽 먼동 틀 때까지 밤이슬 맞아가며 골똘하게 고뇌해보기를 간절히 권한다. 한번 해보면 안다.
큰마음 먹고 한번쯤은 외로운 밤하늘에 누워 볼 일이다. 행운은 도전하는 자에게 걸려든다. 아마도 그대는 쓸쓸한 달빛 아래, 복받쳐 흐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집에만 집착하지 않고 ‘전원과 모든 야지’를 집의 연장선상으로 여긴다. ‘즐거운 나의 집’을 짊어지고 다니거나 차에 싣고 다니는 것을 낙으로 삼아 허허로이 간다. 현대의 산업화와 지식사회에 들어와 ‘아파트’의 편리한 생활이 삶의 편의성이라는 이유로 삶을 망쳐놓았다. 감성 없는 삶은 무의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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