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설의 자연 속으로] 흙과 사는 삶, 지루하지만 가장 옳아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짧은 숲의 공화국
숲은 생명의 문화 공간이며 도시는 죽음의 ‘엔트로피’ 지옥이다. 화려한 도시를 잠재우고 검소한 산길을 간다.
나는 이대로 숲에 며칠간 주저앉기로 했다. 숲 곳곳에 고여 있는 내 자취와 얼에서 새로운 파장을 찾기로 했다. 사유(思惟)나 펜보다 더 순도 높은 자연미에 쌓여있는 동안은 시간이 소용없지만 짧은 생애 그대로가 좋다. 산에서는 한 시간이 늦든 몇 시간이 늦든 하루가 늦든 서둘러댈 일이 없다. 겨울에는 더 그렇다. 그래 겨울 산에서는 시간을 따질게 아니라 생태시간에 사는 호사를 누린다.
숲은 느린 시간과 세월의 탄력으로 침묵한다. 숲은 보이지 않게 자란다. 분명히 자라지만 잠시도 머물지 않고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늘 같은 날이지만 똑같은 날은 하루도 없다.
숲이 내 이웃이다. 여기에 기다림이 있고, 세월이 있고, 삶이 있고, 인내가 있다.
원망과 갈등, 탄식을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종말을 이렇게 기다리며 같이한다. 사시사철 청량한 물소리가 마음을 다스리고, 두꺼운 얼음 계곡 밑에서 졸졸 흐르는 물소리는 이룰 수 없이 청청하다. 이 물길은 이곳 오대산에서 발원하여 내린천~소양강~북한강~한강으로 이어지는 장장 350km의 여정이다. 나는 푸른 녹음과 맑은 물길에 폭 파묻혀 이 물줄기를 따라 서울까지 9일간의 풍류노숙을 하며 걸었다.
아! 벌써 아득한?30년 전의 이야기이다. 지난 추억의 한가슴일 뿐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가슴 뜨겁게 힘찬 발끝에 스러질 것이다. 내 몸으로 밀고나가는 쇠진(衰盡) 만이 살아있는 증표이다.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이 현실이 인간에 주어진 사는 모습이니까. 삶이란 아픔이다.
죽은 척 잠들어 있는 ‘씨앗’에서 삶의 희망 엿봐
농막캠프에 들면 괜스레 일없이 서성대는 게 또한 일이다. 지붕 밑에 매달아놓은 망태기가 궁금하다. 씨앗을 모아두었는데 다람쥐나 날짐승이 침입할까봐 걱정이다. 씨앗은 이 농막에서 제일가는 생명의 재산목록이다.
하잘 것없는 먼지 부스러기처럼 보이는 저 좁쌀알만한 씨앗 속에 그 다양하고 오묘한 생명이 숨겨져 있다는 게 하도 신기하고 고마워서 나는 생의 시조에게 자주 문안을 드린다.
지금은 자는 척 죽은 듯이 잠들어있지만 나비가 날아들고 햇살이 따뜻해지는 봄날에 그네들은 기막힌 세상을 만들어낼 것이다. 나는 덩달아 그의 종살이로 땀방울을 마다 않고 힘이 솟아 가슴에 봄을 품고 쉬엄쉬엄 꾀도 부릴 작정이다.
씨앗은 땅이나 눈 속에 버려놓는 것이 생태적으로 옳은 것인데 동물이 먹어치울까 봐 높은데다 매달아놓는다. 산을 찾는 이유는 새 생명을 많이 심고 퍼트리기 위해서이기도하다.
쌀과 돈만으로는 행복해질 수 없다. 마음의 풍요는 씨앗을 모으고, 뿌리고, 새 생명을 트이는데 있다. 그 과정을 힘들여 노동하는 진정성이 마음의 황폐를 씻어주는 평화이다.
달리 길은 없다. 이것만으로 충분하다. 씨앗과 같이한 쭉정이와 알맹이의 점철이 바로 나의 삶이였다. 흙을 마주하고 같은 일을 반복하면 짜증나고 지루하지만 그 뜻을 곰곰이 새겨보면 세상이 혼잡해질수록 이렇게 사는 방법이 가장 옳을 성 싶다. 세속적인 기쁨으로 들떠있는 도시상업화의 낙원은 ‘이겨도 지는’ 공허한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여겨진다. <글=박상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