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설의 자연 속으로] 눈, 송송이 날아오는 춘삼월 나비 같고

겨울철 산길 걷기란 즐거움과 절제를 만끽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다. 사진은 90세 넘는 연세에도 겨울철 산행을 멈추지 않는 박상설 아시아엔 ‘사람과 자연’ 전문기자


눈사람 눈물 흘리며 이 노인 찾을 것이니

생업을 핑계 대지만 일을 내세워 온갖 거품을 뒤집어쓰고, 남의 눈치보고, 흉내 내는 허황 성세의 의인하(擬人化)를 개탄한다. 이런 삶은 헝클어질 수밖에 없고, 삶과 죽음의 존재성마저 뒤죽박죽 뒤엉켜 일상이 속물로 전락되어 간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남 따라하는 타성을 단칼에 처치할 일이다.

그럴사한 외식이나 일삼고, 상업화된 가치 없는 문화현장을 들락거린다고 돌연 사유의 전환이 일어나지 않을 바에는, 차라리 눈밭에 나가 아이들과 뒹굴 일이다. 무의미한 삶을 무의미한 채로 버려둘 수 없는 나이를 또 한살 먹었다.

춥지 않은 겨울이 없고, 덥지 않은 여름이 없듯이 그리고 지겨운 호미질에서 굳은살이 생기고 핏자국이 맺히듯이 힘든 일을 이겨내는 과정 속에 넉넉함이 스며들고 불언실행(不言實行) 중에 온건한 평화가 온다.

나른하고 감동 없는 일상을 벗어나는 길은 생의 원천인 흙을 파 뒤집어 씨앗을 가꾸어 새싹을 보듬는 순정의 불꽃을 지피면 될 일이다.

해보면 안다. 일하다 주저앉아 석양빛 사이로 흘러드는 나뭇잎 그늘사이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불현듯 시원한 바람과 함께 나를 휩싸는, 아주 짧은 순간에 ‘흙내의 생애’란 바로 이런 거였구나 하는 영감을 얻어 자연인이 되는 것이다.

밭 갈고 때때로 책 읽으니 기쁘지 아니한가

전업농부가 아닌 도시의 근로자가 바쁜 시간을 쪼개어 틈틈이 목가적인 영농과 레저놀이를 하는 생활이, 인생을 소박하고 흔들림 없이 깊게 한다는 것에 대해 나는 50년간의 한결같은 실험과 경험을 통하여 확고한 신념을 얻은 산 증인이다. 그 대신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밭을 정성껏 경작하고 레저를 즐기는 이상으로 책을 늘 끼고 열심히 독경(讀耕)해야 한다는 전제이다.

그러나 책에만 빠지면 행동 않는 사변적 허수아비로 전락되기 때문에 반드시 역동적인 문화설계를 끊임없이 만들어내어, 생활 속에 수혈해 아웃도어 생활을 이끄는 튀는 차별화로 인생의 재미를 시스템화하여 언제나 휴가를 지내는 양 여백을 즐긴다. 아쉽고 설레는 마지막 해를 보내며 새해 해돋이를 보는 열성패거리들로 정동진이 난리법석이다.

그러나 이와는 아랑곳 없이 고요한 산 속의 눈을 밟으며, 새해에 씨를 뿌리고 신나는 여행계획에 가슴을 부풀리며, 책 한권을 마주하는 연말은 어떠한 새해가 기다리고 있을까? 사는 방법은 다 다르겠지만 그대는 ‘어느 쪽’인가?

그 명작, 그 시(詩) 한 구절을 눈 덮인 오지산골에서 설경을 바라보며 읽는 정경은 평생을 살아낸 소중한 사연들이 한순간의 푸른 보석으로 스며드는 찰라이리라. 마음이 아직은 메말라 버리지 않은 탓인지 풍성하게 쌓인 눈을 만난 강아지처럼 마냥 신나게 눈을 긁어모아 눈사람을 만들었다.

다음은 김삿갓의 눈 詩이다.

飛來片片三月蝶
踏去聲聲六月蛙

송송이 날아오는 춘삼월 나비 같고,
밟을 적마다 나는 눈 다져지는 소리는 유월?개구리소리 같구나

엄동설한 눈 속인데도 눈사람이 다 돼갈 무렵 나는 땀이 흥건했다. 날이 하도 추워 눈이 바스락거리기만하지 전혀 뭉쳐지지 않는다. 그래 큰 눈사람을 못 만들고 자그마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김삿갓 시의 춘삼월과 유월을 함께 묶어 풍자한 정경처럼, 눈을 날리고 퍼 나르고 뽀드득 소리 내어 밟고 정신없이 날뛰었다. 쿵쿵 뛰는 가슴으로 눈 어린이를 껴안고 한참이나 바라보며 아가야··· 도대체 내 나이가 몇 살인지 아니? 했다. 모르는 게 더 좋아, 하고는··· 그게 아니라고 삿대질을 해댔다.

이 천진무구한 어린 눈 아이는, 날이 따스해져 태양빛이 놀러오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이 노인을 찾을 것이니 나는 어찌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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