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설의 자연 속으로] “가장이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


한심스런 삶의 문화, 어떻게 고칠 것인가

언제나처럼 오늘 아침신문도 우울하다. 온 나라가 떠들썩하게 서로 물고 뜯는 정치판이나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성폭행 사건 보도를 보며, 나는 세상이 부끄러워 바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엎드려야 마땅했다.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우리의 정치작태가 한심스럽다. 한국 사람에게 정치는 과연 필요악인가? 이런 근본적인 물음조차 회의스럽다. 권력과 기득권 확보를 위한 추태와 돈 추문, 자리와 출세를 위한 그들만의 이익집단, 그리고 네거티브 난장판으로 얼룩진 치졸한 오합지중의 혼탁한 사회를 나는?경멸한다.

그러나 이를 ‘몬도가네’ 이야기로만 돌릴?순 없다. 좋든 나쁘든 우리들의 일이다.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생각해보자.

가정에서는 ‘월튼네 사람들’과 ‘초원의 집’의 드라마에 나오는 착한 아버지, 어머니와 순진하고 낭만적인 딸 ‘로라’처럼 자연과 조국과 이웃과 가족을 사랑하는 선량한 소시민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잘 살 수 있는 모든 기반을 온 국민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 놓았는데도 지금 여러 면에서 혼란과 위기를 맞고 있다. 전 세계 경제와 지구환경의 전망은 비관적이며, 모든 인간들은 건강과 평화로운 ‘힐링‘을 인류의 최대 희망으로 삼고 있다.

이런 현상은 선거철을 맞아 시험되고 있다. 우리 서민들은 묵묵히 나라를 진정으로 아끼는 백성들이다. 이에 반하여 정치권력의 맛에 현혹된 정치꾼과 그들을 추종하는 일련의 정체불명 인간들이 서로 뒤섞여 떠벌리는 꼴은 추악하다. 또 한편으로는 ‘그것이 알고 싶다’의 호사가들이 아우성 치며 사회를 멍들게 하고 있다.

이로 인한 사회적 상처와 사회자본의 손실은 너무나도 크며, 그것이 결국은 모두 국민의 부담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오직 표심에 의해서 정책과 국민의 뜻이 실현되는 조용한 선거 풍토문화가 아쉽다. 선거행사가 케이크 자르고 와인 한잔하는 가벼운 기분의 축제로 이어져 그 전통이 후손에게 이어졌으면 한다. 정치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니라, 성숙된 국민이 되는 길과 더 나은 나라를 만들기 위한 각 가정의 삶의 방식을 같이 고민하자는 것이다.

백가쟁명(百家爭鳴)에 의한 원인과 처방이 난무하고 있지만 모두 남을 비난하는 것 뿐이다. 자신의 장점과 남의 단점만을 떠들어댄다. 밉기도 하고 혐오스럽기도 하지만 우리의 일이니, 더 시야를 넓혀서 우리 자신의 실상을 똑바로 보고 논의하여 치유하자.


“가장이 집에서 앞치마를 두르면 가족은 SNS로 띠울 것”

이 병폐의 치유는 간단하다. 가정이 곧 사회이다. 가정이 치유되면 만사 OK! 가정의 치유는 가족이 아니라 바로 ‘가장’을 저격한다. 정치와 사회 제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핑계를 대지만 가장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이 바뀌지 않는 한 만사는 도로아미타불이다.

가정에서 가장들의 생활문화는 구태의연하다. 특히 노는 방식이 그러하다. 가장들은 직장이나 사회에 나가서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첨단의 문화생활을 하면서, 유독 집에 돌아와서는 표리가 다르게 다른 사람이 되어 진부한 생활에 젖어든다.

자녀는 학교, 직장에 가고 가족 구성원이 온갖 사회교육을 받아봤자 집안에서는 ‘가장’의 생활습성을 따를 수밖에 없는 ‘가정+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주적이다. 가족의 문제가 아니라 삼권을 쥐고 있는 ‘가장’이 변하는 것만이 문제해결의 열쇠이다. ‘가장’의 성역 불가침을 부숴야 한다. 가장이 안 된다고 하면 그게 법이다. 이런 구조를 우리는 미덕쯤으로 여겨왔다. 특히 자연과 노는 다양한 문화면에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사회학자나 언론, 정치권 등에서 이를 문제 삼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단 한번뿐인 인생 무엇으로 살아야 하나? 자연과 연관된 것들과 그에 따른 레저 활동, 문화생활을 삶의 존재 의미로 삼아 가족과 공유한다. 이러한 취향의 재미를 가장이 앞장서면 만사 해결된다. 자연을 마다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흔히들 돈을 번 뒤 또는 일을 성사시킨 뒤에 취향문화를 즐겨야 한다고들 하지만 그런 사람은 그 생각을 무덤까지 끌고 간다.

더 간과할 수 없는 착각은 자식이나 가족은 성장하거나 변화하지 않고 돈 벌 때까지 멈춰있는 듯 그리고 세상은 변화하지 않고 마치 정체해 있는 듯 여기는 자기중심의 이기심이 밉살스럽다.

밖에서는 그렇게 활달하고 일처리를 깔끔하게 잘하던 가장이 집에서는 유난히 가부장적인 무뚝뚝하고 무표정한 사람으로 변모하는 상투성이 문제다. ‘가장’이 앞장서서 가정의 취향문화를 꽃 피워 평화롭고 엘레강스한 가정을 만드는 것 말고 그 외에 또 무엇이 중요한가?

가정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가장이 그냥 가정에 칩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톡톡 튀는 아이디어와 가족을 신명나게 하는 감성어린 분위기를 늘 조성하며 야외레저생활에 중점을 두고 이끈다는 뜻이다. 가장은 늘 파릇파릇하고 지적위트가 넘쳐나며 세련되고 앞서가는 인품의 자격을 갖추어야한다. 가장의 요건은 숙련된 기술자이다.

가장이 가족을 변화시키면, 세상은 내버려둬도 가족에 의해 점차 바뀌어져 나가며 가족의 힘으로 이루어낸 국민의 나라가 된다. 정치꾼이나 잡것들이 사회개혁이니, 무슨 민주화니, 복지니 하면서 국민을 길들이려고 비집고 들어올 틈새를 주지 말아야 한다.

국민 삶의 수준이 높아지고 문화가 세련돼 내적 삶이 풍요로워지면 세상을 겁낼 것이 없다. 가족이 무기이다. 가족의 행복권이 미사일보다 든든한 방어이며 공격무기이다.

그런 세상을 만드는 문화설계자는 CEO인 가장이고, 가족은 땀 흘려 일하며 아웃도어를 즐기는 세계인이고, 놀이터는 초원의 캠프이다. 우리는 지금, 일상생활을 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을 정도의 좋은 세상에서?편리하게 살고 있다.

마트가 집 부근에 널려 있고, 대중교통망은 전 세계에서 제일 잘 돼있고, IT문화는 첨단을 걷고, 사회간접자본 시설은 거의 완벽하고, 전 국토가 1일 생활권으로 형성되어 있고, 집집마다 차량을 보유하고 있어 편리하기 이를 데 없다. 세계가 부러워할 지경이다. 그런데도 편리해진 것은 보이지 않고 모두 못살겠다는 사람뿐이다.

지진 없고 수려한 조국강산 들판에 나가 마음껏 걷다 배고프면 라면 끓여먹고, 나무에 해먹(hammock) 걸고 비박하는 재미로 산다는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 가장이 집에서 앞치마를 두르면 가족은 SNS로 띄울 것이다. 온 가족이 싸이가 되어 방방 말춤을 출 것이다.

우리는 상업주의 물결에 휩싸인 나머지 고생을 사서 한다. 가장은 힘들게 돈 벌고 일하는데, 밑창 빠진 독에 물붓기다. 가정은 소비만 하는 곳이다. 정해진 수입으로 소비를 잘하는 것이 버는 것이다. 불요불급한 소비는 무엇인지 소박한 삶의 잣대로 보면 알 것이다. 아웃도어 생활에 맛들이면 가계지출은 30% 이상 절약된다. 소박해질수록 몸과 마음은 점점 풍요로워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가계지출을 50% 줄였다. 술 문화, 결혼문화, 미용과 성형, 옷치장, 외식, 사우나, 노래방, 쾌락소비를 극도로 줄이면 시골에 농장이 생긴다. ‘가장’이 열성적으로 앞장서서, 자기 가정을 감성어린 낙원으로 만들고 가족과 사회 양쪽의 고민이 해결되게 하라. ‘부르디외’가 주창하는 구별짓기의 ‘아비투스(habitus)문화’로 삶의 질을 높일 것을 권유한다.

빈곤의 대물림은 문화자본의 결핍이며, 취향문화의 부재이다. 이는 철학이며 가장은 가족을 취향문화로 무장시킬 책무가 있다.

이는 이상론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가능하고 시급한 일이다. 사고방식이 구태의연하고 완고한 가장이라도 자신의 가족에게 참된 행복의 길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생각을 바꿀 것이다.

우리 국민의 기질은 혈통을 중히 여기고 가족을 자신의 생명처럼 여기는 본태성이 강하다. 다만 사회의 인습에 갇혀 살다보니, 보다 좋은 생활방식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남 따라 살고 있을 뿐이다. 야외 취향 문화생활이 목가적인 낭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자진해서 개혁할 것이다.

주말을 즐기는 프로젝트를 만들어,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세포조직을 활성화하면, 홍보와 운용방법에 따라서는 동조자가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초원의 집’을 벤치마킹하면 그 삶을 선망하는 사람이 많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 모델링을 보여주는 구조적 시스템이 없어서 활성화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잠재적 수요자들은 옛날로 말하면 상록수 계몽자거나 서구의 살롱문화에 해당된다.

그 누구도 자신의 가정을 ‘초원의 집’과 같은 자연과 같이하는 화목하고 사랑스러운 삶으로 만드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아파트는 생활업무지원 후방기지로 규정하고, 초원의 집은 씨 뿌리고 레저를 즐기는 전방 베이스캠프로 삼는 전략을 말한다. “Home Sweet Home”은 이동주택 텐트 캠프 파라다이스이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