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스승’과 마주하다
AJA, 스승의 날 맞아 참 스승의 뜻 새겨…멘토-멘티 결연
“돌아가시기 전에 ‘바쁜 사람이니 나 아프다고 괜히 전화하고 그러지 마라’고 누차 당부하셨다는 겁니다.”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 뒤 허름한 2층집 식당 ‘고냉지’에서 식어가는 김치찌개 안주를 앞에 두고 왁자했던 후배들은 3초쯤 말과 행동을 멈췄다. 정운찬 전 총리가?꼬박꼬박 찾아뵙던?고등학교 은사님 얘기를 하는 대목이었다.
임종 순간까지 제자 염려한 스승
후배 임철순(한국일보 주필)으로부터 김희정 선생님이 돌아가신 소식을 전해 듣고는 가눌 수 없는 회한에 잠겼다고 한다.
“어려웠던 나의 가정환경을 잘 알고 보살펴주신 스승이다. 전근 가실 때마다 찾아뵙곤 했는데 유학길에 오르면서 연락이 끊겼다. 서울대 총장이 된 뒤에도, 총리가 된 뒤에도 수소문해 봤지만 못 찾았다. 돌아가신 뒤에야 소식을 듣게됐다.” 정 전 총리가 마음 속 스승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시아기자협회(회장 이반 림)는 15일 ‘스승의 날’을 맞아 서울?프레스센터?외신기자클럽에서 ‘내 마음의 스승 모시기’라는 주제로 행사를 마련했다.
정 전 총리는 이날 행사에 늦게 왔다. 경희대학교에서 특강을 마친 뒤 밤 10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이날 행사를 함께 준비하고 치른 외국인유학생 출신 멘티(Mentee)들과 ‘스승의 날’을 맞아 재능을 기부한 예술공연팀, 아시아엔 기자들이 뒤풀이를 하던 허름한 소줏집을 찾은 것이다.
대한독립운동에 헌신하신 의학자로서 “강자에게 호랑이처럼, 약자에게는 비둘기처럼 대하라”는 가르침을 주셨던 석호필(Frank William Schofield) 교수와 학문적 은사 조순 전 서울시장 얘기도 함께 들려줬다. 강단에서 누군가에게 이 세 분의 은사들과 같이 기억되고 싶었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가슴에 불 지핀 스승의 추억
이날 저녁 6시반부터 시작된 ‘내 마음의 스승 모시기’ 행사에서는 사회 각계 스승들을 모시고 각자 마음에 담고 있는?‘스승님’ 얘기를 들어봤다.
강지원 변호사는 학창시절 은사 얘기와 함께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마음의 스승인 ‘간디’에 대해 얘기했다. 인류에게 ‘무저항 비폭력’을 통한 저항의 가치를 일깨워준 사상가 간디도 청소년기 자살을 결심한 적이 있었던 만큼 고뇌와 탐구는 ‘스승의 날’ 새겨볼만한 덕목이라는 얘기였다.
한국의 대표 성우 배한성 서울예술대학 교수는 “멘토(Mentor)에는 4가지가 있는데, 별 볼일 없는 멘토는 그냥 지껄이고, 좋은 멘토는 열심히 가르치려 한다”면서 “훌륭한 멘토는 자기가 직접 시범을 보이고, 위대한 멘토는 듣는 사람 가슴에 불을 지핀다”는 멘트(!)로 좌중의 탄성을 이끌어냈다.
스승이 된 언론인 “선생님이 더 좋다!”
평양과학기술대 박찬모 명예총장은 포항공대 교수 재직 때부터 해마다 빼먹지 않고 꽃다발을 보내주는 제자 얘기를, 한국이 낳은 세계적 성악가인 임웅균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교육은 머리에 남게 해주는 것”이라며 자신의 20년 전통 강의실 풍경을 들려줬다. 강의시작과 끝에 학생들이 임 교수를 향해 기립 박수를 한다고 했다.
구본홍 CTS 사장은 “수십년 방송기자 생활과 YTN 사장 등 줄곧 언론계에만 몸 담아오다가 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됐을 때, ‘아! 이래서 스승이 좋은 것이구나’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여러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강의하고 있는 이형균 KBS 시청자위원장은 “제자들에게 ‘전공 과목의 스승 3명만 만들면 성공한다’는 말을 강조하고 있다”고 말했다.
(위로부터) 방송학회장을 지낸 정대철 한양대 명예교수와 황성혁 황화상사 대표, 독고윤 아주대 교수,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도 각자?스승의 날 행사를 맞은 소회를 밝혔다.
자연주의적 삶을 즐기고 전수하는 캠프 호스트 박상설 카운슬러는 85세 고령의 나이에도 주말레저농장을 운영하는 자신의 삶이 바로 선진국의 질 높은 삶이라고 소개해 참석자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이석연?변호사는 결혼기념일인 15일?부인께 양해를 구하고 이날 행사에 참석했다고 말해 참석자들의?박수를 받았다.
우송대학교에서 강의하는 한국전통떡 명인 선명숙씨는 이날 행사를 위해 자신이 직접 만든 카네이션 모양의 떡 등을 참가자들에게 대접했다.
4월 총선에 출마했던 박선희 새누리당 경기도 안산상록갑 당원협의회 운영위원장은 “이 사회의 스승들을 한 자리에서 뵙게 돼 영광”이라며 “어느 자리에서나 자신의 역할을 다 해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좌중 압도한 개막 퍼포먼스
이날 행사는 동양화가로서 음악과 결합한 ‘드로잉 퍼포먼스’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김묵원 작가의 공연으로 시작됐다.
영화 <워낭소리>의 민소윤 음악감독이 연주하는 대금연주가 자진몰이를 거쳐 휘몰이로 이어지자 영화 <쌍화점>과 MBC <나는 가수다>의 타악연주자 설호종 월드 퍼커셔니스트 타악궤범 대표의 북소리 장단이 흥겨워졌다.
이윽고 김묵원 화백의 형형색색 큰 붓이 하얀 천 뒤에서 출몰을 거듭하자 붉은 카네이션 꽃과 동양화폭 속 난초가 애니메이션처럼 선명해졌다. 참석자들은 화폭에 가느다란 붓글씨로 ‘내 마음의 스승’이라는 글자가 새겨지자 행사 개막을 눈치 챘다.?몇몇 참석자들이 “행사 오프닝 공연 치고는 보기 드문 장관”이라고 칭찬했다.
즉석에서 멘토-멘티 결연식 갖고 축배
이날 행사에서는 한국사회의 스승들과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외국인 청년들이 멘토와 멘티로서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는 축배식도 가졌다.
이날 행사 진행을 맡은 이상기 아시아기자협회 창립회장은 “스승의 날을 맞아 여러 제자들, 스승들과의 저녁 일정을 미루고?지구촌의 하나됨을 위해 시간 내 참석해 주셔서 감사드린다”면서 “각별하게 스승을 존경하고 제자를 아끼는 우리 아시아적 전통을 계승해 하나된 지구촌을 만들어 가자”고 덕담을 했다.
AJA는 해마다 스승의 날을 맞아 후학들과 후배들에게 귀감과 교훈을 주는 스승들을 초청해 존경과 감사의 뜻을 표해왔다. 사제지간의 돈독한 애정으로 지속가능한 발전을 꾀하는 아시아의 비전을 제시해온 AJA ‘스승의 날’ 행사는 올해로 네 번째를 맞았다. 한편 내년부터는 연도수와 일자를 맞춰서?2013년에는 5월13일, 2014년에는 5월14일에 AJA ‘스승의 날’ 행사를 열기로 했다.
글 이상현 기자?coup4u@theasian.asia
사진 민경찬 기자 kris@theasian.as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