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창현의 방북취재기①] 한반도 종횡무진 ‘통일기러기’의 꿈
[아시아엔=평양/글·사진 로창현 <뉴스로> 대표기자] 요즘 평양 시민들은 “자고 일어나면 바뀐다”고 말한다. 평양에서는 초대형 빌딩과 초고층 살림집(아파트) 공사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손전화(스마트폰)가 필수품이 된 지는 오래고 신형휴대폰이 나오는 날 판매소 앞은 인산인해를 이룬다. 출퇴근시간엔 교통체증이 벌어지고 호텔과 대형식당 앞엔 택시들이 줄지어 있다. 멋쟁이 여성이 거리를 활보하고 대동강변의 애완견 산책도 일상 풍경이다. 십수년에 걸친 최악의 경제제재 속에서도 놀라운 변화를 보이는 북녘땅. 시민들 얼굴엔 여유로운 미소까지 보인다. 대체 북녘에선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천리마에서 만리마 속도로 바뀌는 북한
2018년 11월 11일. 중국 심양국제공항 탑승구에서 청색 유니폼을 입은 수수한 화장의 북녘 미녀가 목례를 한다. 생애 첫 방북이었지만 이상하리만치 마음은 차분했다. 마치 늘상 다니던 여행 같았다.
떠나기 며칠 전 서울에서 만난 친구는 내가 평양에 간다니까 “무섭지 않냐?”고 물었다. 순간 실소가 나왔다. 무섭다니.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빙그레 웃고 말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아직도 북은 많은 이들의 뇌리에 두렵고 부정적인 이미지로 비치는 게 사실이다.
솔직히 북은 내게도 멀기만 한 곳이었다. 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당연히 통일을 원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갈라진 땅, 일가친척도, 이렇다 할 연고도 없는 북은 막연히 한번쯤 가보고 싶은 곳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사실 북에 일찌감치 갈 기회는 있었다. 기자생활 초기였던 1990년 북경아시안게임 기간 중 남북통일축구가 전격 성사됐을 때 현지에서 각 언론사 축구담당기자가 한명씩 평양에 갔지만 아쉽게도 서열에서 밀렸다. 이후에도 몇 차례 취재 기회가 있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좌절돼 ‘북녘 취재와는 인연이 닿지 않는구나’ 했다.
금강산, 개성 관광이 한창일 때 개인적으로 북을 갈 수도 있었지만 단순 관광으로 북녘 땅을 밟고 싶지는 않았다. 2003년 내가 근무하던 신문사(스포츠서울)가 뉴욕지사를 세우면서 현지 책임자로 부임한 뒤로는 더욱 북은 머나먼 곳이 되었다.
미주동포 중엔 실향민들이 제법 된다. 두고온 북녘땅에 있는 가족을 보고 싶어 이민 온 이들도 있다. 하지만 미국 시민권을 따고 북에 가서 혈육을 만난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북미간에 수교가 안된 만큼 방문까지는 가능해도 가족 친지들의 정보를 입수해 상봉까지 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2009년 3월 뉴욕에서 북한의 아들이 아버지를 찾는 사연의 편지를 입수해 보도한 적이 있다. 함경북도 부령에 사는 아들 로모씨가 1997년 미국에서 사는 아버지와 평양에서 상봉한 이래 줄곧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수년 전부터 소식이 끊겨 애태우는 내용이었다. 이 사연은 동포사회는 물론, 한국에도 널리 알려져 화제를 모았다.
북한~미국 오가는 개인편지
많은 사람들이 북한에서 편지가 미국까지 올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북한이 ‘철천지원쑤의 나라’고 부르는 바로 그땅에서 미국에 개인이 편지를 보낼 수 있다니···.
이때의 경험은 오랫동안 잊고 지낸 북녘 겨레에 대한 생각을 진지하게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내가 사는 뉴욕엔 합법적으로 거주하는 ‘북한인들’이 있다. 북측 유엔대표부 직원과 가족들이다. 이들은 뉴욕 맨하탄과 퀸즈 사이에 이스트리버에 있는 루즈벨트섬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북미간 수교관계가 없기 때문에 유엔본부를 중심으로 30마일(약 48km) 이상 벗어나지 못한다.
더러 유엔본부에서 열리는 회의나 기자회견 등에서 북 대표부 사람들을 보기는 했지만 따로 말을 섞을 생각은 못했다. 무엇보다 국가보안법이라는 현실적 제약 탓이었다. 그런 내가 방북을 꿈꾸게 된 것은 <뉴스로> 강명구 칼럼니스트가 2017년 9월 유라시아대륙횡단 마라톤에 나서면서부터다. 네덜란드 땅끝마을부터 동쪽으로 매일 마라톤 풀코스 거리를 14개월간 달려 북녘땅에 들어가 평양과 판문점을 거쳐 서울까지 골인하겠다는 그의 포부는 도저히 불가능한 도전으로 보였던 게 사실이다. 1만5천km를 무탈하게 뛴다는 것 자체가 전 세계 누구도 해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강명구 칼럼니스트를 평양에서 환영하겠다고 마음먹고 2018년 초부터 방북할 수 있는 길을 백방으로 알아보았다. 그때만 해도 외국 영주권을 가진 재외국민들은 통일부에 신고하고 북녘 방문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해 8월 LA의 풀뿌리 통일단체 AOK 정연진 상임대표와 연결이 되면서 단촐하게 3명이 팀을 이뤘고 방북문제도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돌발사태가 발생했다. 강명구 칼럼니스트가 10월초 북중 접경지대인 중국 단둥에 도착했지만 결국 입북이 무산됐고, 북경의 조선(북한)총영사관까지 날아간 우리도 방북비자가 취소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미국에서 여기까지 날아왔는데 그냥 돌아가야 한다고? 오기가 생겼다. 일단 서울로 돌아가 방북계획을 다시 짰다. 북녘문화유산답사로 계획을 급변경, 재신청한 지 일주일만에 비자가 발급되는 낭보가 전해졌다. 통상 북녘 방문을 하려면 6주전 신청해야 하고 관광도 최소 3주전에 하지 않으면 제 날짜에 갈 수 없는데 기적같은 일이었다.
나중에 전해들었지만 북측은 우리가 중국까지 헛걸음을 하고도 다시 비자신청을 했다는 소식에 미안한 마음을 가졌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