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 왜 그렇게 편 가르면서 살아?”

고 김수환 추기경에게 조문을 가서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추기경에게 “당신은 누구 편입니까”라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실까? 혹시 “당신들! 왜 그렇게 살아?”라고 말씀하시진 않을까. 혼자서 씩 웃으며 돌아섰다.(본문 가운데) 

지금도 여전히 독재정권시대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싸워야 한다. 그럴 용기가 없는 사람이라면 어찌해야 할까? 가만히 ‘엎어져’ 있기라도 해야 한다.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은 없을까? 있다. 결코 앞잡이 노릇을 해서는 안 된다. 그 앞잡이들로 인해 독재는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고 고통 받는 이들은 더욱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사꾸라’ 노릇도 마찬가지다. ‘나팔수’나 그 실질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가 적색독재지역이라면 어떠할까? 역시 마찬가지다. 적색이든 백색이든, 독재는 악(惡)이므로 대체로 그 해답은 자명하다. 그런데 지금 非독재시대에 들어서서도 분위기는 묘하다. 얼마 전까지는 적색독재무리들을 발 벗고 나서서 두둔하는 자들이 설쳐대더니, 지금 정권이 바뀌어서는 과거 백색독재시절, 그 앞잡이 노릇하던 자들까지 어느새 고개를 쳐드는 기운이 보인다.

이 나라가 미쳤나? 웬 앞잡이들이 이리도 설쳐대나? 아직도 백색‧적색독재 정권들의 잔재를 가차 없이 청산하지 못한 탓일까? 인간의 욕망이 그리도 끈질긴 탓일까?

지난 세월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있다면 한 가지 기록할 만한 것이 있다. “당신은 누구 편이냐?”는 것이었다. 이런 질문은 실로 시도 때도 없이 많이 받았다. 과거 정치검사들이 설쳐대던 시절, 3차례나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 좋다는 이유로 공안부에 검사로 발령이 났다. 고작 1년여 근무하다가 아니나 다를까 정치적 사건을 두고 대판 싸우고 뛰쳐나왔다. 정치권의 입맛에 맞게 순응해줄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그들은 물었다. “당신은 누구 편이냐?”고.

변호사로 전직한 후 TV나 Radio에서 시사프로그램의 진행을 요청해 왔다. 한동안 재미있게 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프로그램의 폐방이 결정됐다고 했다. 이유가 뭐냐고 했더니 이번엔 당시 야당소속 시장이던 MB를 출연시켜 1시간씩이나 선전할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었다. 웃기는 일이었다.

KBS1 Radio의 ‘안녕하십니까, 강지원입니다’는 내 스스로 그만 두었다. 시사프로를 진행할 때 나는 정중앙(正中央)의 위치에서 공정하게 방송하리라고 마음먹었다. 또 방송진행자는 늘 그래야 한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방송 끝날 때마다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있다. 역시 “당신은 누구편이냐”는 것이었다. 때마침 아내가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할 대법관에 취임하게 돼 그나마 오해소지마저 없애주기 위해 얼른 집어 치웠었다.

뿐만 아니다. 정치권의 요청도 수없이 받았다. 그런데 진짜 웃기는 일이 있다. 정당이라면 정치적 견해를 같이 하는 자들이 뭉쳐 조직하는 결사체 아닌가? 그렇다면 자기들과 견해를 같이 하는 자들을 찾아야 할 것인데 “나는 정치는 모른다”고 대답하면 꼭 되묻는다. “그러면 누구 편이냐?”고.

나도 사람인 이상 생각이 있다. 정치, 경제, 사회, 이념, 문화에 걸쳐 어찌 생각이 없겠는가? 나는 다만 ‘무표시층’에 속할 뿐이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패거리의 일원 또는 앞잡이로 취급되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또 세상에는 ‘무표시층’으로 지탱해야 할 사람들이 있다. 예컨대, 선거관리 종사자, 직업공무원, 방송토론진행자 등등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세상은 좌파‘꼴통’이나 우파‘꼴통’들이 설쳐대지 않는 세상이다.

그 패거리나 앞잡이들이 서로 치고 받고 싸우지 않는 세상이다. 건강한 우파와 건강한 좌파가 서로 공존하며 경쟁하는 세상이다. 그런데 지금 어디 그런 근처에라도 가고 있는가? 그래서 지금은 바로 그런 풍토를 만드는 것이 보다 시급한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나까지 그 어느 쪽에 숟가락 하나 더 얹어 감투 나부랭이 하나 더 얻어 쓰기는 쉽다.

그러나 적대적 대결이 아니라 선의의 경쟁을 하고 승자가 패자를 위로하고 패자가 승자를 칭찬하는 좋은 모습을 만들어내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매니페스토 정책경쟁 풍토를 조성하고자 노력해보는 소이도 바로 그런 것이다.

요즘 ‘좌도, 우도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이다. 테니스코트에 좌와 우가 없나? 있다. 없다면 가운데 네트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좌나 우에 속한다. 다만 그 존재방식이 서로의 공존을 인정하고 서로 존중하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슨 놈의 존재방식이 게임 중에 서로 멱살 잡아 흔들고 머리카락을 물어뜯으며 게다가 게임이 끝난 후까지 코트 밖에서 멱살잡이를 계속하는가?

내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중정(中正)’이다. 아니, ‘중향(中向)’이다. 중정은 수직(ㅣ)과 수평(一)이 만나는 지점이다. 그런데 그 지점은 인간이 쉽게 도달하기 어려운 지점이다. 신(神)의 영역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내가 지향하는 바는 중(中)을 향하는 마음이다. 동(東)향도, 서(西)향도, 남(南), 북(北)향도 아니고 좌이든 우이든 반드시 중을 향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까? 상대편이 적군이 아니라 동반자로 보이게 될 것이다. 상대편에서 배울 것도 많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필요에 따라서는 생각을 빌려올 수도 있게 된다. 때로는 상대편을 사랑하게 될 수도 있다. 마치 성별이 다른 남녀가 서로 사랑하게 되듯이. 중향(中向)을 공간적으로 보면 특정 방향에 치우지 않으려는 것으로 설명되지만, 양적으로 보면 지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즉 과
유불급(過猶不及)의 상태를 지향하는 마음으로 설명할 수 있다.

다수결의 원칙을 존중하면서도 다수의 횡포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반면에 소외되고 고통 받는 사회적 약자에 대해 배려하고 지원하고자 하는 마음도 중향(中向)의 마음 아닐까.

고도성장한다면서 독재를 하거나, 민주화한다면서 성장을 배척하는 것도 모두 지나치거나 부족한 것 아닐까. 적정성장과 적정분배, 적정효율성과 적정속도를 지향하는 마음이 중향의 마음 아닐까. 돈, 권력, 명예도 청부(淸富), 청권(淸權), 청명(淸名)이라야 중향이 아닐까. 나는 오늘도 반성한다.

혹시 치우침은 없었을까. 혹시 지나치거나 부족함은 없었을까. 고 김수환 추기경에게 조문을 가서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추기경에게 “당신은 누구 편입니까”라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실까? 혹시 “당신들! 왜 그렇게 살아?”라고 말씀하시진 않을까. 혼자서 씩 웃으며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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