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설의 자연 속으로] 내가 캠핑마니아가 된 까닭


무척 덥다. 글을 쓰려고 책상머리에 앉았다 다시 일어서고 말았다. 글이 더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갇혔다. 더 이상 뒤적거려본들 마땅한 생각이 떠오를 것 같지 않아 집을 박차고 나섰다. 집에 갇히면 생각이 움츠려들고, 세상 밖으로 나가면 날개가 펴진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막막해지면 이렇게 떠돈다.

걸으면서 생각하기로 했다. 생뚱한 곳에 있다는 느낌 하나로 충분하다. 걸어야 길섶의 들풀과 바람을 만난다. 신발을 벗어들고 맨발로 색시걸음을 했다. 발바닥이 아파 견딜 수 없다. 그래도 살그머니 걸었다. 기진한 몸에 힘이 솟기 시작했다. 가능성은 늘 걷기에 있다. 작열하는 폭양을 피해 바다기슭의 숲에 들었다.

가끔 걷던 길이다. 이게 웬일인가. 저만치 붉은 해당화가 활짝 피어있다. 언젠가 반겨 봤던 가시 돋친 그 꽃, 멀고 먼 길은 너를 만나기 위해서였구나. 살아 있다는 것은 이런 거구나···. 어디서 끝날지도 모르는 길을 굽이굽이?휘감는다. 길은 한줄기 바람같이 흐트러졌다 모이고 퍼진다. 비선형(非線型) 길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삶의 궤적인가.

아스라한 기억이 엎치락뒤치락 뒤엉킨다. 그 어느 것과도 같이 했던 것들인데 이제와 모호하다. 저 들꽃들도 피는 대로 보이지만 그 들꽃이 아니다. 지난해도 오고 올해도 왔지만 이제 자운하게 사라져간다.

석양 들녘에 있다. 그대로 버려둔다. 할일 없다. 그냥 있다. 해 떨어져, 밤이 지난다. 어둠. 이대로 좋다. 길 위에서, 늘 깨어난다. 시원(始原)의 힘. 소멸의 힘.

절망을 딛고··· 오토캠핑으로 이루어낸 정조(情調) 무드(mood)의 치유. 최후를 각오한 여행! 조용한 고별을 예비했다. 마음이 아파지고 망가지고 싶었다. 길 위에 나를 버리기 위해 먼 길을 떠났다. 나는 눈앞의 유혹에 더 이상 현혹되지 않는다. 텐트를 걸머지고 비행기에 올랐다.

20여 년 전 나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1년을 넘기기 어렵다는 의사의 소견을 접하고 모든 것을 접기로 하였다. 죽음은 혼자 떠나는 것. 내 나이 63세 때이다. 걷지도 못하는 몸으로 병원을 박차고 나왔다. 모든 것을 버려야 여한이 풀릴 것 같았다. 가족에게 기대면 같이 망할 게 뻔했다. 어차피 죽을 바에는 산에 나를 버리기로 했다.

걷는 시간만이 살아있는 증표라 여기고 스틱에 의지해 겨우 한발 한발 떼었다. 그길로 미국을 위시해 여러 나라를 혼자 떠돌아 다니며 얼마 남지 않을 여생을 강도 높게 압축해 여분의 삶을 동냥하기로 했다.

미국 의사의 처방은 아스피린을 하루에 한 알씩만 먹고, 그 외의 약은 일체 먹지 말고 좀 심할 정도의 산행을 계속하라는 것이었다. 발병 전에도 등산은 꾸준히 해왔지만 의사의 권유에 의해 더욱 고난도의 등산을 쉬지 않고 해냈다.

죽기 전에 더 늦기 전에 할 일이 있다. 한 번도 안 가본 죽음··· 걷고 또 걸어 기진(氣盡)해 쓰러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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