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현 칼럼] 시진핑 시대, 왜 차이위안페이(蔡元培)를 주목하는가?①
턱수염장이 장따궈(章大國)의 차이위안페이 예찬
몇 해 전 베이징 대학에서 만나 금세 친해진 장따궈(54세)는 청나라 대학자 장쉐청(章學誠, 1738~1801)의 직계 손자로, 꾀죄죄한 ‘볼품’에 비해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는 차이위안페이(蔡元培, 1868~1940) 예찬론자다. 그 앞에서 차이위안페이 얘기를 꺼내면, 차이위안페이에 대한 일화를 토해 내느라 두 세 시간이 지나도록 입을 다물 줄 모른다. 장따궈는 오랜 세월 동안 저장성 사오싱(紹興)에 위치한 차이위안페이 옛집(故居)을 굳게 지키고 있다.
그의 직함은 교수, 차이위안페이 기념관장, 저장성 역사인물 연구소장 등 다양하다. 그러나 굳이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무명의 향토사학자라 부르는 것이 보다 적절할 듯 싶다. 장따궈는 요즈음에도 이소룡이 ‘정무문’에서 화려한 발차기를 선보일 때 신었던 싸구려 검정 헝겊신을 즐겨 신고 다닌다.
독특하게 턱수염만을 기른 작은 키의 장따궈는 이마에 땀을 닦아가며 힘주어 말한다.
“만약에 차이위안페이라는 사상적 거목이 없었더라면 루쉰도, 마오쩌둥도, 오늘날의 중국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차이위안페이의 경력은 다채롭다. 청조의 진사, 한림원 관리, <문변文變>과 <경종일보警鐘日報> 창간, 광복회장, 교육부 장관, 베이징대학 총장, 중불교육회장(中佛敎育會長), 중앙연구원 원장 등 역임한 공식 직함만도 무려 26개에 이른다. 그에 대한 호칭 또한 다양하다. ‘행동하는 양심’, ‘중국 근대 미학의 개척자’, ‘학계의 태두’, ‘근대의 공자’ 등이 그것이다.
차이위안페이는 72세의 생애 동안 파란곡절의 삶을 살았다. 진사 출신으로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으나, 그가 애써 이룩한 한림원의 ‘철밥통(鐵飯碗)’을 헌신짝처럼 내던져 버렸다.
그는 베이징의 차이스커우(采市口)에서 참수 당한 ‘무술 육군자(戊戌 六君子)’ 가운데 특히 담사동(譚嗣同, 1865~1898)의 죽음을 몹시 애석해하였다. 일본으로 망명한 캉여우웨이(康有爲,1858~1927),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의 행보와 ‘변법유신운동’의 좌절에 심한 울분을 느꼈다. 그리고 곧 바로 한림원의 관리직을 사임하고 혁명가의 길에 올랐다.
쑨원(1866~1925)이 임시 대총통에 오르자, 차이위안페이를 임시정부 초대 교육부 장관에 임명하였다. 그는 곧 바로 루쉰(1881~1936)을 교육부로 불러들인다. 이 후 열세 살 아래인 루쉰과 평생의 동지로서 나이를 초월한 ‘망년지교(忘年之交)를 맺는다. 자신 보다 4년 먼저 타계한 루쉰의 장례위원장을 맡았으며, 루쉰 전집 편집위원장으로서 그의 사후까지도 철저히 보살폈다. 장남으로서 늘 생계에 고통을 겪었던 루쉰을 ‘친 동생’ 보살피듯 돌본 것이다.
1917년, 베이징대학 총장에 취임한 차이위안페이는 ‘사상의 자유’, ‘인재 제일주의 원칙’을 내걸고 부패와 수구에 찌든 대학 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다. 파벌을 초월하여 닥치는 대로 인재를 불러 모았다. <중국인의 정신>의 저자 꾸훙밍(辜??,1857~1928), 마르크스 이론에 밝았던 리따자오(李大釗, 1889~1927), 상하이에서 활동하며 <신청년>을 이끌었던 천뚜슈(陳獨秀, 1879~1942), 컬럼비아 대학 박사 후스(胡適, 1891~1962) 등이 그들이었다.
이로 인해 “차이위안페이가 남으로 가면 인재가 남으로 몰려오고, 북으로 가면 북으로 몰려든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이들은 차이위안페이 총장의 적극적인 후원과 지지 아래 자신의 포부를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그가 인재를 끌어들이기 위해 얼마나 절치부심하였는지를 일깨워주는 재미있는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한다.
25세의 청년학자 량수밍(梁?溟, 1893~1988)은 불교 및 인도철학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갖췄으며, 차이위안페이는 우연히 그의 논문을 접하고 그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 무렵 베이징 대학 학생 중에는 량수밍 보다 나이가 많은 ‘원로 학생’들이 부지기수였다. 젊은 량수밍을 ‘모시기’ 위해 아버지뻘 되는 차이위안페이가 직접 찾아갔다.
나이도 어리고 강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베이징 대학 교수직을 단호히 거절하는 25살 아래의 량수밍 설득에 나선다. 결국 량수밍은 연구에만 전념하는 조건으로 수락하였다. 요즘으로 치면 파격적인 대우를 받는 ‘연구교수’였던 셈이다.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전통은 한낱 소설에나 등장하는 얘기가 아니었다.
차이위안페이가 베이징 대학 총장으로 재직 당시, 그 보다 25살이나 젊은 마오쩌둥(1893~1976)은 베이징 대학 도서관 관장, 리따자오 밑에서 사서로 일하며 이 대학의 마르크스연구회 등에 적극 관심을 기울였다. ‘청조 전복’에 앞장섰던 신해혁명의 주체 세력, 차이위안페이 총장은 그에게 있어서 우상과 같은 존재였다.
차이위안페이는 마오쩌둥의 첫 부인이었던 양카이휘(?開慧, 1901~1930)의 구명운동에도 앞장섰으며, 그의 장인 양창지(?昌?,1871~1920)를 베이징 대학 교수로 초빙하기도 하였다. ‘진사 출신 혁명가’로서 명망이 높았던 차이위안페이와의 공적, 사적 인연으로 인해 마오쩌둥은 그를 더욱 잊지 못한다. 마오쩌둥은 애도 조문에서 그를 ‘만세의 귀감’이라 표현하였다.
차이위안페이가 상아탑에 개간한 ‘사상의 자유’라는 토양에 리따자오가 마르크스연구회를 통해 공산주의의 씨를 뿌렸고, 리따자오를 진정한 스승으로 ‘숭배’했던 25살의 마오쩌둥은 신중국을 건설하는 주역이 되었다. ‘우물을 마시는 자는 우물을 판자의 노고를 잊어서는 안된다(喝水不忘掘井人).’ 말이 새롭게 다가온다.
각 액면가의 지폐에는 예외 없이 마오쩌둥의 얼굴이 새겨져있다. 여전히 그는 ‘인민의 우상’으로 남아있다. 차이위안페이나 리따자오 같은 사상의 거목들이 없이 마오쩌둥이 홀로 우뚝 설 수 있었을까?
턱수염장이 장따궈는 오늘도 차이위안페이의 옛집을 지키며, 방문객에게 차이위안페이 예찬에 열을 올리고 있을 것이다.
“차이위안페이 선생이 없었더라면, 마오쩌둥도, 오늘날의 중국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아침 햇살처럼 새롭게 떠오른 지도자 시진핑(習近平)! 그 앞에는 부정부패 척결, 빈부 격차 해소, ‘소강(小康)사회’ 건설 등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다. 시진핑! 그는 과연 누구를 스승 삼아 13억 인민을 이끌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