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현의 중국이야기] ‘장안의 달’이 보고 싶거든 달려오라
장안일편월(長安一片月)
만호도의성(萬戶搗衣聲)
이백의 자야오가(子夜吳歌)라는 시의 일부이다. 사랑하는 낭군을 전쟁터에 보내고 잠 못 이루는 밤, 방망이질 하며 남편이 돌아오기만 학수고대(鶴首苦待)했던 장안의 여인네들. 독수공방, 젊은 아녀자의 애끓는 한(恨)이 방망이 소리와 함께 짙은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그때나 지금이나 장안(섬서(陝西)성 성도, 서안의 옛 지명)의 달은 변함이 없으리라.
천년도 훨씬 더 지난 지금 다듬이돌을 두드리던 여인네의 딸들은 선글라스를 끼고 자가용을 운전하며 장안 거리를 누비고 다닌다. 고급 백화점에서 쇼핑을 즐긴다.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포도주를 곁들인 산해진미와 베이징 카오야(??)를 만끽한다. 빌딩 숲 사이로 이어진 자동차의 물결이 ‘21세기 성당(盛唐)’의 극치를 보여준다.
차창 문 밖으로 ‘장안대학’이라는 글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왠지 낯설지가 않다. 우리에게도 장안이라는 지명은 너무나 익숙하다. 중랑구에 소재한 장안중학교로부터 장안대학, 장안평 중고시장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은 전국에 널려 있다.
지난 해 10월 초, 중국의 국경절을 이용하여 섬서성 서안과 연안(延安), 함양(咸陽) 등지를 여행하려고 맘먹었다. 일주일 전쯤 기차표를 파는 간이 매표소에 들렀더니 표가 다 팔리고 없었다. 아쉽게도 여행을 포기하고 훗날을 기약해야 했다.
그리고 몇 달이 흘렀다. 우연히 서안과 지척에 있는 웨이난(渭南)이라는 작은 도시에 소재하는 아담한 대학에서 ‘객경(客卿)’의 신분으로 교편을 잡게 되었다. 한국사람이 드문 곳을 찾아다니고 싶은 객기 탓으로 아내에게 늘 ‘맞아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아내의 전화음성은 예사롭지 않다. 얼굴이 새파래진 것 같다. 본래 걱정이 많은 아녀자들인지라, 사고치지 말고 무조건 어서 귀국하라고 야단이다. 늘 그런 식이다. ‘뙤국과 뙤국 사람들’, ‘짱깨 사람’들에 대해 편견과 선입관이 여전하다.
섬서성으로 간다고 하니 리빙칭(李氷淸)까지 펄쩍 뛰며 찬물을 끼얹는다. “왜 하필 그런 형편없는 곳으로 가세요? 가족들이 찬성할까요?” 마치 유배지역으로 떠나는 ‘죄수’를 바라보듯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아 속으로 이 ‘못난이’에게 일갈하였다.
“네 일이나 걱정해라. 쓸데없이 참견하지 말고.”
아무 것도 모르면서 까부는 이 처녀를 응시하면서 되물었다.
“이 선생은 섬서성에 가봤어요?”
“아니오. 얘기만 들었어요.”
대답이 가관이다.
정작, 자신은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으면서 오지랖 넓게 남의 ‘앞길’을 막고 나선 것이다.
리빙칭은 한신(韓信)의 고향인 장쑤성 화이안(淮安) 출신으로 난징사범대학 한국어학과를 졸업한 재원이다. 지금은 인하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한국에서 편의점 아르바이트, 휴대폰 조립공장 등지에서 거친 노동일을 해가며 산전수전 다 겪은 아가씨다. 이 아가씨의 눈에 비친 섬서성은 서북부 내륙의 낙후된 성, 안 가 봐도 뻔한 곳이다. 무거운 짐을 끌고 섬서성을 향해 집을 나서자 갑자기 군시절, 인제·원통으로 발령받아 향할 때처럼 서글프고 처량한 기분마저 들었다.
“섬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
불과 몇 달 전 기차표를 못 구해서 아쉽게 발길을 돌렸는데, 지금은 이곳에 살고 있으니 세상 일은 참 알 수가 없다. 순박하기 이를 데 없는 학생들은 동상에 갈라 터지고 퉁퉁 부은 손가락으로 칠판에 쓴 글씨를 열심히 받아 적는다.
인구 50만 남짓한 조용한 시골도시, 웨이난. 재래시장에서 팔이 아프도록 큰 배추 두 단을 샀다. 우리에 비하면 헐값이다. 붕어빵 두 개 값밖에 안 된다. 택시를 탔다. 택시 기본요금도 800원 남짓 한다. 베이징, 항저우, 난징 등 대도시의 그것에 비해 3분의 1 가격이다.
초명품, 초일류대학, 최고도시를 지향하는 일류병자 한국인들이여! 베이징, 상하이에서만 우글거리지 말고 눈을 내륙 깊숙이 돌릴지어다. 구석구석 아름다운 중국의 전원마을이 그대를 향해 손짓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