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현의 중국이야기] 中 보이보, 보시라이 韓 문대성, 김구라

만년의 보이보 <사진출처=바이두(baidu.com)>

신 중국 건설에 기여한 8대 원로 중 보이보(薄一波, 1908~2007)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풍파로 얼룩진 세상에서 100세를 살다 갔다. 백발에 흰 눈썹이 인상적이다. 1925년에 공산당에 입당하여 80여 년 동안 당적을 유지하였다. 1949년 갓 태동한 중국 정부의 초대 재정부장을 맡아 4년 가까이 재임하였다. 경제 분야의 공로를 인정받아 국무원 부총리의 지위까지 올랐다. 등소평과 호흡을 맞춰 개혁 개방 노선을 펴고 이를 본궤도에 올려놓았다. 그를 후세인들은 ‘강직하며 아부할 줄 모르는 인물(?正不阿)’로 평가하였다. 그는 도덕적으로도 명망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부귀, 명예 그리고 자손의 번영까지 지켜보며 천수를 누리다 갔다. 이 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있을까.

그는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다. 그 중? 보시라이(薄熙?,62)는 두 번째 부인 후밍(胡明,1919~1967)과의 사이에 태어난 넷째 아들이다. 보시라이는 다롄 시장, 랴오닝 성장, 상무부장, 충칭시 서기 등 부친의 후광을 업고 승승장구하였다. 그는 부친에게서 학덕, 품격, 도덕관 등 교육적 유산을 물려받았다고 훗날 회고하였다. 그러나 부친처럼 ‘관운장구(官運長久)’하지 못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던가. 극에 달한 본인과 부인의 야심이 그들을 공멸의 길로 내몰은 것이다.

‘법 앞에 특수한 지위를 누리는 국민은 없다(法律面前?有特殊公民)’

지난 4월11일자, 인민일보 사설에 보이는 글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특수한 신분의 공민’이란 태자당의 한 사람으로 불리며, 권력을 향해 질주하던 보시라이를 지칭하는 말이다.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그도, 부패 스캔들의 핵심으로 떠오르며 몰락하였다.

나라 밖에서 안으로 눈을 돌려보니 김구라, 문대성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그치질 않는다. 김용민의 ‘막말파동’에 이어, 인기 방송인 김구라(본명 김현동, 42)도 무명시절, 세치 혀를 함부로 놀린 ‘죄’로 정점에 이른 방송활동을 접었다. 정신대로 끌려간 할머니들의 ‘한’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코 내뱉은 말의 화살이, 길고 긴 세월을 거쳐 그의 가슴 한 가운데에 꽂혔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기자들이 등교 길에 오른 그의 아들에게까지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이대며 “아빠, 지금 어디 계시냐?”고 물었다. 어린 가슴에 재차 비수를 꽂은 것이다. 누구를 정죄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격언이 더욱 실감나게 다가올 뿐이다.

‘화려한 돌려차기’ 한 방으로 세계적 스포츠 스타가 되었던 문대성도 ‘표절이냐, 아니냐’로 다시 세계적인 이목을 받는 ‘스타’가 되었다. ‘문도리코’에서부터 ‘ctrl + v’, 문 박사가 아닌? ‘문 복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식어도 따라붙었다.

돌려차기 한 방이 인연이 돼 박사, 교수, IOC위원, 국회의원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가 생각하듯?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가 보다. 그는 끝까지 뉘우칠 줄 모르고 “운동과 학업을 병행하다 보면 그럴 수 있는 것 아니냐”고 강변하였다.

“왜 나만 갖고 그래”

한 때 유행했던 이 말이 지금 다시 회자되고 있다.

한번 돌아선 민심은 싸늘하다. 학위를 준 국민대에서도 문대성의 논문이 표절이라고 공식 인정하였다. 누워서 침을 뱉은 꼴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의 ‘극적인 몰락’을 누가 예견이나 했겠는가.

중국 속담에 ‘사람은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경계해야 하고, 돼지는 살찌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人?出名, 猪??)’고 하였다. 마치 문대성류(類)의 고속 출세하려는 자들을 경계하기 위해 마련된 속담 같다. 이른바 ‘문대성 파문’은 튼튼한 기초 없이 헛된 명예나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위태한 일인가 하는 것을 세인들에게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다.

더러운 이름은 오래도록 기억된다(遺臭萬年). 학위를 수여한 대학과, 교수로 임용한 대학도 ‘유취만년’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문대성을 비호하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다. 다만 그를 배태하고 성장시킨 체육계의 토양, 학문적 토양, 정치적 토양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이다. “내가 잘못 지도했다”고 나서는 스승은 온 데 간 데 없고 제자만 무차별 ‘몽둥이세례’를 당하고 있다. 문대성이 그 지경에 이르도록 방치한 사람들은 과연 누구인가. 장막 뒤에 숨는다고 죄가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윗물이 흐렸으니 아랫물(문대성)이 어찌 홀로 맑을 수 있겠는가.

‘독야청청(獨也靑靑)’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타협하기는 쉽다. 살아있는 고기만이 격류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탁류에서 나고 자란 ‘병든 물고기’가?거센 물결을 가르며 올라갈 수 있겠는가. 칡넝쿨처럼 뒤엉킨 ‘악의 뿌리’를 근원부터 제거하지 않고서는 치유할 방법이 없다.

‘빈대 하나 잡으려고 초가삼간 다 태운다’는 말이 있다. 이 속담이 왠지 현 세태와 괴리된 듯해 씁쓸하다. 대학과 사회, 정치무대에 ‘인간 빈대’가 하나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연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빈대가 하나 둘이 아니라면, 초가삼간을 다 태워서라도 빈대를 박멸해야 한다. 뱀도 잡아먹고 동료도 잡아먹는 황소개구리가 생태계를 교란한다면 건전한 생태계 유지를 위해 퇴치하는 것이 마땅하다. 다행스럽게도 요즘 우리의 연못가에는, 한 때 가공할 번식률로 맹위를 떨치던 황소개구리가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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