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현의 중국이야기] 윈난인이 기리는 ‘철기 이범석 장군’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2009년 여름의 얘기다. 상하이의 여름은 찌는 듯이 더웠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가슴 사이로 땀이 줄줄 흘러 내린다. 더위를 피해 윈난성 쿤밍(昆明)으로 발길을 돌렸다. 상하이에서 쿤밍까지 기차로 장장 33시간에 이르는 기나긴 여정이었다.

쿤밍에 도착하니 거짓말처럼 전형적인 천고마비(天高?肥)의 날씨였다. 아침에는 냉기를 느끼기까지 했다. 쿤밍은 사시사철 온도가 봄날처럼 온화하여 ‘춘성(春城)’이라고도 부른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휴양 도시 쿤밍은 한국의 은퇴자들에게도 인기 있는 도시로 꼽힌다.

불현듯 이범석(李範奭) 장군이 수련했다는 육군 강무당에 가보고 싶어졌다. 한인회 사무국 종사자를 비롯하여 민박집 주인 아저씨 등 만나는 한국 교포들에게 닥치는 대로 그 곳의 위치를 물었다.

그러자 그들의 반응은 한결같이 냉담하였다. “그런 곳이 쿤밍에 있었나요? 잘 모르겠는데요. 철기 이범석 장군? 그 분이 누구시죠?” 라며 오히려 의아해 한다. 이곳 교민들이 모르는 것으로 봐서 아마도 강무당은 이미 폐허가 됐거나 흔적조차 사라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서 며칠 뒤 산보 중에 청소부 아저씨에게 육군 강무당의 위치를 물으니? “그것도 모르느냐”는 투로 짜증스럽게 일러준다. ‘추이후(翠湖) 공원’ 부근에 있다는 것이었다. 알고보니 육군 강무당은 이 곳의 명소로서, 쿤밍 시민들에게는 서울역 찾기 보다 쉬운 곳이었다. 이른 새벽, 가곡 ‘선구자’를 흥얼거리며 한 걸음에 달려갔다.

“일송정 푸른 솔은 홀로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혜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강무당은 국가 주요 문물 사적으로서 그 자태가 잘 보존돼 있었다. 잔디가 닳아 없어진 축구장만한 크기의 아담한 연병장에서 달리기와 배드민턴을 하는 쿤밍 시민들의 모습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이범석(1900~1970) 장군이 기병(騎兵) 병과에 입교하여 교육을 받았던 강무당(후에 강무학교로 개칭)은 1909년에 윈난성 독군(督?)인 탕지야오(唐繼堯, 1883~1927) 장군이 세운 정규 사관학교이며, 아름다운 추이후 공원(昆明市 翠湖 西路 22?) 바로 맞은 편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 중국의 십대 원수(元帥)로 꼽히는 주더(朱德, 1886~1976), 예젠잉(葉劍英,1897~1986)을 비롯한 중국의 걸출한 군사적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특히 예젠잉 원수와 이범석 장군과는 기병 병과 12기 동기생이라고 한다.

아직 출근하기에는 이른 시간, 강무당 연병장을 거닐 던 중 뜻밖에 쉬청젠(徐承謙, 48세) 윈난성 육군 강무당 문물보호관리소장을 만났다. 몇 해 전 한국 공군사관학교 학술 세미나 자리에서 그와 담소하며 술잔을 기울인 적이 있어서 서로 금세 알아보았다. 그가 마침 조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병장 한 편에 자리잡은 낡은 그의 사무실로 따라 들어갔다. 그가 사진 자료, 관련 문헌 등을 보여주며 철기의 발자취를 들려 주었다. 연말에 강무당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대대적으로 보수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들었다.

21세 피끓는 나이에 청산리 전투를 진두지휘하였으며, 대한민국의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바 있는 철기(鐵驥) 이범석 장군! 그가 1919년 이 곳 윈난 강무당 기병과를 수석 졸업한 사실을 그동안 까마득히 잊고 지냈다.

이범석 장군 기념사업회에서 펴낸 『이범석 장군 평전』에 그의 입교에 관한 얘기가 보인다. 그는 애국지사 신규식 선생의 주선으로 쑨원(?文)의 특별 추천을 받아, 나이를 두 살 올려(실제 나이 16세) ‘해외 화교 이국근(李?根)’ 이라는 가명으로 어렵게 강무당에 입교하였다고 한다.

몇 년 전 충북 청주에 소재한 공군사관학교 주최로 김좌진 장군과 이범석 장군의 생애를 조명하는 한중 학술세미나가 열렸다. 이 자리에 쿤밍 사회과학원 원장(龍東林, 58세) 등을 비롯한 연구원들이 대거 참석하여 발표와 토론을 벌였다.

철기 장군 평가 작업에 중국인들이 오히려 더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들은 이범석 장군이 청산리 전투에서 김좌진 장군과 함께 항일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거대한 발자취를 남겼음을 새삼스레 일깨워 주었다.

서 소장에 의하면,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요 인물의 한 사람인 이범석 장군이 운남 강무당 출신이라는 사실에 이곳 지식인들은 커다란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세미나 참가 당시, 마치 이웃집 손자가 남의 할아버지 내력을 손금 보듯 꿰뚫고 있는 것 같아 적지 않은 자괴감이 들었다. 쿤밍의 한인 교포사회에서 무관심 속에 잊혀진 인물, 이범석 장군을 현지의 중국인들은 ‘자랑스런 윈난인(雲南人), 자랑스런 한국인’으로 기리고 있었던 것이다.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황소의 간담을 서늘케했다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 이래로, 자랑스런 대한국인의 기개와 자취는 이역만리 중국 땅 곳곳에 스며 있어 우리의 피를 더욱 끓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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