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현 칼럼] 시진핑 시대, 왜 차이위안페이를 주목하는가?④
난양공학 학생들의 우상이던 ‘차이위안페이(蔡元培)’
난양공학(현 상해 교통대학)은 청조에 헌신할 양무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성쉬안화이(盛宣懷, 1844~1916)가 광서제에게 주청하여 전보국, 상공국 등의 잉여자금으로 창설한 학교였다. 1901년 차이위안페이는 이 학교의 특별반 주임으로 초빙돼 이 반 교육을 담당했다. 특별반 학생들은 고문에 능통한 수재 또는 거인출신으로서, 졸업 후 외교 등 각 분야에서 일하고자 하는 당대의 지식 계층이었다.
따라서 한림원 관리 출신인 차이위안페이라야 학급의 ‘거인 어르신’들을 장악할 수 있기에 그를 특별반 주임으로 초빙한 것이다. 특별반 학생들은 반나절은 중문 서적을 공부하고 반나절은 영어, 수학, 체조 등을 학습했다. 그는 매일 저녁, 두 세 명의 학생들을 연구실이나 숙소로 불러 대화와 토론을 즐겼다. 학생들의 이목을 세계로 집중시키고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 흐름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지도했다.
한편, 그는 학생들의 사유 및 언어능력 배양을 중시했다. 사회를 이끌고 군중을 계도하려면 말을 잘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변론회나 연설회 같은 소조를 설립하여 연설과 변론방법 등을 가르쳤다. 아울러 방언 사용을 지양하고 표준어인 보통화 사용을 적극 권장했다.
난양공학 시절의 애제자였으며, 국무원 부총리를 역임(1949~1954) 했던 황옌페이(黃炎培, 1878~1965)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당시 차이위안페이 선생의 1차 변론주제는 ‘세계 진화에 따라 도덕도 증진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등이었다. 그가 출제한 작문의 주제는 ‘춘추전국시대의 애국 사례를 들고 논하라’ 등이었다. 이 같은 주제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더라도 의미심장하다.”
차이위안페이에 대한 특별반 학생들의 존경심은 대단했다. 학생들에게 한림원 관리 출신은 추앙받는 존재였다. 그러나 봉건사상에 찌든 난양공학의 완고한 당국자들과의 갈등을 빚어 결국 학교를 떠나고 만다.
변법 유신사조의 영향으로 전국 각지에서 신식학당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그런데 교과서가 태부족하여 큰 문제였다. 상하이 교육계의 거물인 차이위안페이 등이 1902년 중국교육회를 설립하였다. 그 창립 취지는 분명하다.
“청년들에게 교육을 통해 지식을 축적하고 국가 관념을 증진시켜 장차 국권회복을 위한 기초를 다지는 데 있다.”
중국교육회의 역점 사업으로는 교과서 편집 및 인쇄, 교육신보 발간, 남녀공학 학당 개교 준비, 상점·공장·회사 설립 및 운영 등이었다. 회원의 역량 부족, 경비 문제 등으로 많은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중국교육회는 혁명역량을 축적하고 혁명사상을 전파하는 데 적극적인 작용을 했다. 발기인의 한 사람이었던 장웨이차오(蔣維喬)는 <중국교육회의 회상>에서 회고하였다.
“상하이에서 창립된 중국교육회는 표면적으로는 교육단체였으나, 사실상 은밀히 혁명을 부추긴 급진적 성격을 띤 단체였다.”
중국교육회위 설립 취지에 따라 같은 해에 애국여학과 애국학사가 세워졌다. 1902년 차이위안페이와 장관윈(蔣觀云), 황종양(黃宗仰), 린사오취안(林少泉) 등이 공동으로 애국여학교를 세웠다. 애국여학교는 여권신장을 부르짖었고, 젊은 여성들에게 혁명사상을 주입할 목적으로 설립됐다. 애국여학교 창설 후 차이위안페이는 같은 해 11월 26일 상하이에 애국학사를 세웠다.
차이위안페이는 애국학사의 책임자로서 여기에 큰 희망을 걸었다. 애국학사의 학제는 각 2년제의 심상과와 고등과로 이루어졌다. 중국교육회의 책임자들은 모두 교원을 겸직하였다. 차이위안페이도 윤리학을 강의했고, 우징헝(吳敬恒)은 천연론(天演論)을 가르치면서 사감을 겸했다. 장웨이차오가 초급 국어, 장타이옌(章太炎, 1869~1936)이 고급 국어를 강의했다. 장타이옌은 강의할 때 교과서를 사용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이 쓴 <광복대의(光復大義)>를 거침없이 가르쳤다. 그는 후에 ‘국학대사(國學大師)’의 반열에 올랐다. 애국학사의 구성원은 모두 중국교육회 회원들로 구성됐다. 애국학사는 곧 학교이자 상호부조단체였다.
애국학사 내에는 정치적 열기가 넘쳤고, 구성원들은 ‘혁명’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을 추호도 꺼리지 않았다. 난양공학 시절, 스승과 제자들이 거리낌 없이 ‘혁명’을 주제로 담론을 즐겼듯이, 이곳에서도 차이위안페이와 애국학사의 제자들은 소리 높이 혁명을 외쳤다. 애국학사는 정신의 해방을 만끽하는 공간이었다.
한편, 애국학사는 아동과 소년들을 선발하여 이들의 교육에 힘썼다. 애국학사 사원들이 주로 교사 노릇을 했고, <아동세계>라는 잡지를 발간하였다. 그림을 넣어 편집한 이 잡지는 1903년 4월 6일에 창간돼 5월 28일까지 31호가 발간됐다. 이후 점차 확대돼, 학설·정치·시국·역사·지리·물리·화학·평론·번역총서·신간 소개 등의 지면이 생겨났다. 이 잡지는 심오한 내용을 알기 쉽게 전달했으며, 신지식을 보급하고 진보사상을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애국학사의 독특한 운영방식은 청년 학생들의 관심을 끌었으며, 각지 학교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애국학사의 인원은 비록 별로 많지 않았으나, 영향력은 날로 증대됐다. 이곳은 진보적인 학생의 교류처이자 각지 학생투쟁의 발원지가 됐다. 청년들은 소문을 듣고 학사로 쇄도했다. 난징 육사(陸師)학당을 퇴교한 40 여명의 학생들이 애국학사에 입학했다. 육사학당 퇴교생들은 군사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애국학사에서 군대체육을 가르치는 주역이 됐다. 이듬 해 5월 경 애국학사의 학생은 132명으로 증가했다.
중국교육회와 애국학사의 명성이 자자해졌고, 당시 중국 내에서 가장 중요한 애국혁명단체의 하나가 됐다. 차이위안페이도 본인의 의도와 달리 상하이에서 혁명의 중심인물로 부각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