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현의 중국이야기] 한중수교 20년 성과와 반성
겉으로 보기에는 등을 돌린 것 같지만 끈끈하고도 질긴 남녀 간의 애정관계를 연근(藕根)에 비유하여 ‘어우뚜완쓰렌(藕???)’이라고 한다. 한중 양국도 이와 비슷한 사이가 아닐까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단시간 내 이렇게 여러 분야에서 교류의 불길이 활활 타오를 수 있을까?
1992년 8월24일 한국과 중국 간에 역사적 수교가 이뤄졌다. 그리고 올해로 만 20년을 맞이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거의 40년만에 ‘죽의 장막’이 걷히고 따스한 햇볕이 찾아든 것이다. 한국과 중국의 관계를 흔히들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라고 한다. 숙명적으로 같이 어울려야 할 민족이 중국민족과 한민족인 것 같다. 두 나라의 교류는 문화예술 분야에서 특히 뜨거웠다.
문화란 물과 같아서 묵묵히 만물을 적셔준다(文化如水 潤物無聲)
언제, 누가 한 말인지 잘 모르겠으나 문화의 의미를 불과 여덟개 한자로 적절히 잘 풀이한 것 같다. 수교한지 채 몇 년도 안 돼, <대장금>의 이영애를 필두로, 김희선, 장동건, 강타, 강동원, 원더걸즈 등 ‘한류스타’들이 중국 대륙을 뒤흔들었다. <대장금>을 방영하는 날은 베이징 거리가 쥐죽은 듯 고요하였다고 한다. 베이징교통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던 통징차이(?景才, 68세) 교수에게 들은 얘기다.
한중수교 20년! 그 가시적인 성과를 한번 들여다보자. 한중 양국의 교역 규모는 수교 당시 63억 달러에 불과하던 것이 작년 말 2200억 달러로 무려 35배 이상 증가하였다. 2004년에 이미 중국은 한국의 제1의 수출대상국으로 부상하였다.
2009년 10월13일자 <인민일보> 자매지 <환구시보(環球時報)>의 보도를 인용한 자료이다.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100만명을 돌파하였다. 대략, 북경 20만명, 청도 10만명, 상해 7만명 그리고 천진에 5만명이 거주하고 있다. 한국인이 1만명 이상 거주하는 도시만도 14곳에 이르고 있다. 한국기업도 4만여개가 진출하여 활동하고 있다.
특히 베이징의 왕징(望京), 선양의 씨타(西塔), 칭다오의 청양(城?) 등은 코리아타운이 잘 형성돼 있다. 아름다운 해변도시, 칭다오는 인천과 지척의 거리에 있고 한국사람들이 밀집해 있어 ‘인천시 청도구’라고도 불린다. 일찍이 도산 안창호 선생은 중국 땅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절치부심하였다. 선생은 북단의 만주지역부터, 강남의 난징, 우씨(無錫) 등지를 유랑하였다. 미국에도 오래 살았던 도산 선생이 중국 땅에 왜 그토록 미련을 가졌을까? 아마 정서적, 역사적, 문화적으로 동질감을 느꼈던 것 같다.
한국사람들의 ‘한류(漢流)’ 열풍 또한 뜨겁다. 2007년 자료에 의하면, 중국에 유학한 외국인 유학생 20여만 중에 한국유학생이 6만7000여 명에 이르고 있다. 외국인 유학생 세 명 중 하나는 한국인 유학생인 셈이다. 2위인 일본인 유학생 수는 1만8000여 명, 3위인 미국인 유학생 수는 1만4000여 명에 불과하다. 중국유학 열기가 일본이나 미국의 그것에 비해 얼마나 뜨거운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중국인의 한국 방문객 수도 매년 급증하고 있다. 작년 한 해 약 220만 명이 한국을 방문하였다. 지난 설날에도 중국인 5만 명이 한국을 다녀갔다. 중국인 유학생 수도 8만명에 이르고 있다. 고려대, 연세대 두 대학에만 5000명에 달하는 중국 유학생이 공부하고 있다. 양 대학 캠퍼스에 중국학생들이 넘쳐난다. 상당수 지방대학들도 중국 학생들로 머리수를 채우고 있다.
양국간 교류가 날로 무르익어 가는 시점에서 아쉬운 점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부 대학들이 자질이 부족한 중국학생들을 불러다가 무조건 학점을 줘서 내보내는 ‘학위 공급소’로 전락하고 있다. 상당수 중국학생들은 공부는 안하고 식당, 공장 등에서 아르바이트 하기에 바쁘다. ‘돈 독’이 단단히 올랐다. 아예 곧 바로 직업전선에 뛰어들기도 한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돈 벌 궁리만 하다가 귀국길에 올라서는 한국을 욕한다는 서글픈 얘기도 들린다. 중국학생에게도 ‘한국선비’의 엄한 채찍질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치원식 ‘복합형인재’ 길러야
중국에 진출한 중소기업 중 80~90%는 실패하여 손 털고 나온다고 한다. 대부분 너무 성급하게, 속을 잘 알 수 없는 ‘자장면 나라’에서 쉽게 ‘아리랑 굿판’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 사장들은 중국문화와 중국어도 모른 채 골프장, 발 맛사지센터, 룸살롱 위치부터 확인한다. 그리고 몇 차례 접대를 통한 설익은 ‘꽌시’를 통해 ‘형님!”, “아우!” 말을 트며 사업을 시작한다. 그러니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다. “일본기업은 중국에 진출하기 전, 중국에 와서 1년 동안 중국어 학습에만 전념한다”고 들려주는 모 페인트 기업 한국인 사장의 얘기는 의미심장하다.
한국 유학생도 문제다. 진정한 실력을 갖춘 인재는 찾기 힘들다. 통역 면에서는 조선족에 족탈불급(足脫不及)이다. 중국에서 비싼 학비를 들여가며 10년 이상 머물고도 반풍수(半甁醋), 선무당 소리를 듣는다. 정작 필요할 때 써먹을 수가 없다. 진정한 ‘중국통’이 되기란 쉽지 않다. 옛적의 서양선교사들처럼 중국에 뼈를 묻을 각오를 해야 한다.
고운(孤雲) 최치원은 12살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29세에 귀국할 때까지 17년 가까운 세월을 중국에 머물렀다.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여 지방 관리를 거쳤다. 24세에 황소(黃巢) 토벌 전쟁에 참가하여 유명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황소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고운 선생은 말과 문장, 외교력, 담력, 지도력 등을 고루 갖춘, 당나라와 신라에서 필요로 하는 복합형 인재였다. “중국 전문가가 없다”고 책상에 앉아 한탄만 하고 있을 일이 아니다. 13억 인구 대국, 중국에 맞설 ‘복합형 인재’를 길러내야 하는 것이 정책당국의 초미(焦眉)의 과제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