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현의 중국이야기] 서민들의 ‘오지랖’과 돈 맛

베이징 역이나 상하이 역, 시안 역 등 대도시 역 주변은 자못 살벌하다. 사람들은 저마다 가방을 둘러메고서도 그것도 불안한 지 가방 끈을 잔뜩 움켜쥐고 있다. 버스 안에서도 ‘소매치기 조심’, ‘소지품 주의’ 등의 문구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기차 안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한 젊은 남자는 꽤나 큰 검정 가방을 보석 다루듯 들고 화장실을 들락거린다. 혹시 말을 걸어 올까봐 신문을 보거나 아예 잠을 청하는 척 하는 사람도 있다.

집 주인(房棟)이자 가까이 지냈던 왕궈량(王國良, 40)은 기차 안까지 따라와 짐을 올려주며 어린 조카대하듯 당부한다. “수면제를 탔을 지도 모른다. 가방은 24시간 손에서 놓지 말고 품고 다녀라.”

그가 참으로 오지랖이 넓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사회도 한때 역 주변 등 붐비는 곳에 소매치기가 극성을 부렸으며, ‘눈뜨고 코 베가는 세상’이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랴. 정저우(?州)에서 베이징으로 향하던 열차 안에서 스포츠용품 가게를 한다는 뚱보와 말문이 트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어댔다.

그는 낯선 이방인과 지독한 입냄새를 풍겨가며 침이 마르도록 쉴새 없이 지껄여 댔다. 허난(河南)은 한국 물건이 매우 귀하므로 화장품, 된장, 고추장 등을 들여와서 팔면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었다. 교편을 잡고 있다고 말하자 곧 바로 “시간당 8000위안(145만원)을 버는 강사를 보았다”면서 그 방향으로 매진하라고 귀띔해준다.

은퇴한 공산당 간부였던 쑨바오청(??成, 65) 내외는 당직실 안에서 24시간 연중무휴로 먹고 자면서 경비 역할도 하고, 화장실 청소며, 책걸상 수리 등을 도맡아 한다. 조그만 공간이 이들에게는 주방이요, 거실이자, 복덕방이요 삶의 안식처였다. 허난 사투리도 익히고, ‘득인심 득천하(得人心得天下)’의 진리도 체득할 겸 이들의 ‘안방’을 수시로 들락거렸다. 덕분에 스탠드, 이불, 야전 침대 등 온갖 생필품을 싸게 구입하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오지랖’ 면에서라면 그의 부인도 뒤지지 않는다. 눈에 띄기만 하면 시동생에게 하듯 귀찮을 정도로 만두며 삶은 달걀이며 먹을 것을 챙겨준다.

어디를 가나 ‘오지랖 넓은’ 서민들의 인심은 넉넉하다. 학교 후문에 자리잡은 누추한 식당을 맛이 있건 없건 간에 줄기차게 다녔다. 주로 6위안짜리 칭자오러우쓰(?椒肉?)를 먹었다. 얇게 썬 돼지고기와 풋고추를 얹은 볶음밥이다. 단골 고객이라고 1위안을 깎아준다.

한 달에 두 내외와 남동생 등이 셋이서 뼈빠지게 일해야 고작 3000위안(55만원) 정도 번다고 하였다. 한 명당 우리 돈으로 채 20만원도 못 버는 셈이다. 한 번은 주인 겸 주방장이 다가와 부드럽게 말을 건넨다.

“중국 음식이 입에 맞지 않죠? 한가할 때 오시면 주방을 비워줄 테니 재료를 가지고 와서 직접 요리를 해 드세요.” 인정미 넘치는 훈훈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안휘성 황산 부근,저장(浙江)의 명소 첸다오후(千?湖)에서 흘러나오는 지류에서 강태공의 후예들이 ‘세월’을 낚고 있다. 시간도 때울 겸 낚시하는 한 아저씨에게 말을 걸었다. 이름이 장징산(?景山, 63)이라고 하였다. 그 역시 퇴직한 공산당 말단 간부였다. 취미가 같으면 대화도 통하는 법, 결국 집에까지 ‘끌려가서’ 자신이 직접 요리한 붕어 찜에 술까지 대접받는 ‘호사’를 누렸다.

한편, 돈 맛에 취해 여름 날 ‘돼지고기 변질되듯’ 쉽게 변하는 인심도 적지 않다. 유학사업으로 제법 돈을 번 40대 초반의 저우퉈(周拓)는 불룩 튀어 나온 배만큼이나 탐욕스럽다. 돈으로 사람을 부리는 방법을 안 탓인지 교활하기까지 하다. 직원이라야 불과 서너 명 남짓한데 수시로 사람의 ‘목’을 친다. “너 아니면 사람이 없냐?”라는 식이다. 파리 목숨인 것이다. “돈 몇 푼 벌더니 사람이 많이 변했다”고 주위 사람들이 혀를 내두른다. 돈 맛을 보면 사람들이 왜 ‘환장(換腸)’을 하는 것일까.

어느 해 여름 날, 윈난성 다리(大理)시의 절경, 얼하이후(?海湖) 주변을 산책하다 지름길을 발견하고 마을로 들어서려 하자 촌민이 입구를 자물쇠로 채워 놓았다. 통과하는 데 돈을 달라는 것이었다. 이른바 ‘통행세’라는 것을 받고 하루 종일 자물쇠를 채웠다 풀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봉이 김선달’이 중국에도 버젓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10위안을 요구하다가 2위안까지 내려왔다. 자신의 집 앞으로 난 길을 관광객이 수시로 출입하자 기발한 ‘돈벌이’가 생각났던 것이다.

디칭 장족촌(迪慶 藏族村, 샹그리라(香格里拉)의 원래 지명)의 티베트 청년 두린치제(?林七杰)는 주변 호수를 15분 정도 자신의 고물차로 구경시켜 주고 150위안을 요구하였다. 야박하다는 생각이 들어? “티베트 사람 인심 한번 고약하다”며? 빈정대자,? “나도 먹고 살아야 하잖아요”라고 응수한다. 이들에게서 더 이상 순박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인심 좋고 ‘오지랖’ 넓은 ‘촌놈’들이 돈 맛을 알아 ‘환장’할까봐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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