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현 칼럼] 시진핑 시대, 왜 차이위안페이를 주목하는가?③

“차이위안페이(蔡元培), 그 놈을 주살(誅殺)해야 한다.”

'백일유신'의 좌절로 베이징의 차이스커우(菜市口)에서 참수당한 탄스퉁(譚嗣同,1865~1898), 차이위안페이는 탄스퉁의 의로운 죽음을 몹시 애석해 하였다.

청일전쟁의 패배에 이어 변법 유신운동의 좌절은 차이위안페이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다. 유신운동의 주도적 인물이었던 캉여우웨이와 량치차오는 일본으로 망명했고, 탄스퉁(譚嗣同), 양루이(??), 린쉬(林旭), 양선슈(?深秀), 류광디(?光第), 캉여우푸(康有溥, 康有爲의 동생) 등 이른바 ‘무술 육군자(戊戍六君子)’는 처형됐다. 이들은 ‘변법자강’을 통해 쓰러져가는 중국을 구하려 마지막 남은 피 한 방울까지 다 바쳤다.

차이위안페이는 도피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일부러 의로운 죽음을 택한 ‘열혈남아’ 탄스퉁의 인물됨에 매우 감복했고, 그의 죽음을 애석해 하였다. 탄스퉁은 권력자에게 빌붙어 출세하려는 짓을 몹시 싫어했으며, 그러한 조류에 휩쓸려 부화뇌동하지 않았다. 변법자강운동은 비참한 결말을 맺었고, 차이위안페이는 청조의 정치개혁에 회의를 품었다.

“낡은 방법으로 오늘날의 풍속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인의 고상한 말이 무성하고, 천하를 지킬 좋은 법도가 있어도 아무 쓸모가 없다. 마치 졸렬한 마부가 수레를 바꾸고, 서투른 주방장이 칼을 바꾸는 것처럼 쓸데없는 짓이다.”

마침내 그는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는 평소 서방의 지식에 갈증을 느꼈던 터라 꾸준히 관련 서적을 탐독했다. 당시 그가 주로 읽은 책은 변법유신에 관한 저작들과 외국의 역사와 현상을 소개하는 서적들이었다. 예를 들면 정관잉(???)의 <성세위언(盛世危言)>, 마젠중?建忠)의 <부민설(富民?)>, <철도론(鐵道論)>, <법국해군직요서(法?海??要序)> 등이다. 여기서 말하는 ‘법국’이란 프랑스를 말한다.

아울러 리구이(李圭)가 미국 건국 100주년 기념박람회를 다녀온 후 지은 <환유지구인록(環游地球引錄)>을 숙독하였다. 이 책은 일종의 귀국 보고서이자, 미국 사회와 접촉한 최초의 기행문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서방의 민주 과학기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염원이 절절이 담겨있다.

아울러, <전학원류(??源流)>, <전학입문(??入?)> 등과 같은 근대 자연과학 서적을 탐독했다. 진사출신인 그에게 과학기술은 오랫동안 해괴한 잡기로 금기시됐던 탓에 이러한 지식을 습득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과학기술 지식을 학습한 것은 그가 후에 과학기술 입국에 대한 신념을 갖게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무술변법운동이 서태후 일파에 의해 진압된 후, 차이위안페이는 변법유신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공공연히 청조에 대한 분노와 실망감을 표출하였다. 완고한 수구파들로서는 그의 이러한 개혁적 태도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차이위안페이는 ‘철밥통’처럼 아무리 내던져도 깨지지 않는 귀족들을 질타했다.

“단지 귀족들은 봉록과 제삿밥에 맛을 들여 사리에 어둡고 말로만 ‘배만(排?)’을 부르짖는다.”

완고한 귀족들에게 ‘자유분방한’ 차이위안페이는 눈엣가시였다. 서동(徐桐)은 그를 가리켜, “난신적자(亂臣賊子) 한 놈이 있는데 모두가 힘을 합쳐 그 놈을 주살(誅殺)해야 한다”며 맹공을 가하였다.

‘백일유신’이 비참한 결말을 맺은 1898년 9월 하순, 그는 벼슬살이의 험악한 분위기에 혐오를 느껴 권속들을 데리고 베이징을 떠나 상하이, 항저우를 거쳐 사오싱으로 되돌아왔다. 당시 사오싱에는 중서(中西)학당이 있었다. 이 학당은 사오싱 현의 공금으로 세워진 일종의 공립학교였다. 차이위안페이는 잠시 이 학당의 책임자로 일했다. 그는 이때부터 일생토록 교육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된다.

이 작은 학당에도 신·구 양파가 존재했다. 다수파인 신파 교원들은 민권, 여권 신장을 주장하고 적자생존의 경쟁원리를 강조했다. 차이위안페이가 신파 교원들을 변호하며 이들의 ‘거두’로 행세하자 미움과 질시의 대상이 됐다. 악의에 찬 구파들은 차이위안페이를 “변법유신을 지지한 패역한 신하”로 매도하였다. 그는 이에 모욕을 느끼고 격분을 참지 못해 사직했다. 비록 타의에 의해 중서학당을 떠나게 됐지만 구국인재 육성이라는 그의 원대한 포부는 추호도 변하지 않았다.

중서학당을 사직한 차이위안페이는 저장성 승현(?縣)에 위치한 섬산(剡山) 서원 원장으로 초빙되었다. 이곳에서 과학의 중요성을 적극 제창하여 직접 강연에 나섰다. <섬산서원 규약>을 제정하여 서원개혁을 서둘렀다. 그러나 재정문제로 서원이 어려움에 처하고 개혁이 지지부진해지자 1년 만에 이곳을 떠났다.

뒤이어 임안현(臨安縣)에 가서 농민을 위해 소학교를 열었다. 그가 고향에서 교육 활동에 종사한 기간은 그다지 길지는 않지만 교육구국의 초심을 잃지 않았다. 이 후에 상하이에서 진일보한 난양공학(南洋公學, 상해 교통대학 전신)을 운영하며 혁명인재 배양과 혁명사상 고취에 전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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