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현의 중국이야기] 시중쉰과 시진핑의 인생유전①
얼마 전 모 언론의 사설에서 ‘박비어천가’라는 말로 박근혜 당선인에 대한 지나친 ‘띄우기’를 꼬집었다. 중국에서도 시진핑 가계를 홍보하는 이른바 ‘시비어천가’로 눈이 부실 지경이다. 지난 해 12월 24일, 신화사에 실린 시진핑에 대한 특집기사를 간추려 보았다.
시진핑의 부친, 시중쉰(習仲勛? 1913~2002)은 싼시성(陝西省) 웨이난시(渭南市) 푸핑현(富平縣) 사람이다. 그는 이 곳에서 잔뼈가 굵었다. 시중쉰은 만 21세도 채 안 돼 섬감변구(陝甘邊區) 주석이 되었다. 그는 전설적 혁명가, 류즈단(劉志丹? 1903~1936)과 함께 섬감변구 혁명근거지 창도자의 한 사람이다.
시중쉰은 신 중국 출범 후 요직을 맡아 베이징으로 자리를 옮기기까지 대부분의 삶을 싼시성 옌안 등 혁명근거지에서 유격활동을 하며 장제스의 초공(剿共) 작전을 막아냈다. 마오쩌둥은 그를 “제갈량보다 더 대단한 인물(比?葛亮??害)”이라 추켜세웠다.
시중쉰은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에는 중앙인민정부 위원, 인민혁명 군사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1950년에 중공 중앙 선전부장에 발탁되었다. 시진핑이 갓 태어난 1953년 9월에는 정무원(현 국무원) 비서장 직에 올랐다. 순풍에 돛단 듯 그의 관직생활은 거칠 것이 없었다. 1959년부터 3년 반을 국무원 부총리로 지냈다. 1962년, 마침내 그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이른바 소설 <류즈단>의 작가, 리젠퉁(李建? ?1919~2005, 류즈단의 제수)과의 대담 중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 것이 문제가 됐다. 소설은 1958년에 집필을 시작하여 모두 여섯 차례나 수정을 거친 끝에 1962년에 완성되었다.
제 3차 수정본에서, 반당분자로 몰려 비명에 간 가오강(高岡? 1905~1954)의 행적을 평가하고 ‘미화’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6차 수정본에서는 가오강에 관한 부분이 삭제되었는데도 당시 정치국 후보위원이었던 캉성(康生? 1898~1975, 본명 자오룽? 趙容)이 이를 문제 삼은 것이다. 비운의 조선인 혁명가 김산(1905~1938, 본명 장지락? 張志樂)도 바로 이 악명 높은 캉성에 의해 ‘일제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되었다.
시중쉰은 결국 반당행위자로 낙인 찍혀 1962년부터 1978년까지 장장 16년간 고초를 겪었다. 문혁의 광란이 가라앉은 후 광동성 제 일서기로 화려하게 부활하였다. 그는 경제특구 건설 등 개혁개방의 기초를 다졌다.
‘인생유전(人生流轉)’이라 하였다. 시진핑도 부친의 운명과 다를 바 없었다. 문혁의 광풍이 불어 닥치자 그도 비판받아 옥살이를 했으며, 떠돌이 생활과 굶주림을 견뎌야 했다.
1969년 초, 16세의 시진핑은 섬북 농촌에서 7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 그의 첫 번째 직함은 ‘연천현 문안역공사 량가하 대대(延川縣, 文安驛公社 梁家河大隊)’의 당 지부 서기였다. 이 무렵 토굴집에서 지냈다. 벼룩 천지인 그 곳에서 벼룩에 물려 온 몸이 물집으로 가득하였다. 단지 구들에 앉아 농약가루를 뿌려 벼룩을 소탕해야 했다.
그 밖에 씨뿌리기, 인분 퍼나르기, 석탄 캐기, 제방 쌓기 등 그가 안 해 본 일이라곤 없었다. 10리에 이르는 산길을 100근(50kg)이 넘는 보리 가마를 어깨에 지고 날랐다. 7년간의 힘들었던 농촌 생활은 그를 단련시킨 유익한 시기였다.
그는 바쁜 일상 가운데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마침내 1975년에 숙원하던 청화대학에 입학하였다. 그가 훗날 ‘철흔(哲欣)’이라는 필명으로 절강일보에 232편의 칼럼을 기고한 것도 평소 독서 습관이 낳은 결과이다.
고향 섬북의 농촌 생활을 통해 농민의 희로애락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대학 졸업 후 국무원, 중앙군사위에서 근무하였다. 이 후 절강성, 복건성, 상해시의 서기를 역임했다. 최고 지도자에 오르기까지 그가 견지한 가치관은 명쾌하였다.
“보도블럭을 이리 저리 옮기는 식의 공허한 행위를 그쳐야 한다. 물고기의 씨를 말리는(竭澤而漁) 식의 무모한 경제발전은 도움이 안된다.… 국가의 모든 권력은 인민에게 귀속된다는 관념을 가져야 한다. 인민이 무엇을 가장 바라며, 인민에게 가장 급박한 문제가 무엇이며, 인민이 무엇을 제일 염려하고, 무엇을 가장 원망하는 (最盼,最急,最憂, 最怨) 지를 파악하여 반드시 해결하도록 힘써야 한다.”
인민과 함께 웃고 함께 슬퍼하였던 그에게 ‘평민 서기’라는 칭호가 붙여졌다. 13억 인민과 8200여 만 당원의 리더, 시진핑! 지금 전 세계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주목한다. 그는 지금 부정부패와의 전쟁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파리’부터 ‘호랑이’에 이르기까지 부패한 자들은 다 때려잡으라”고 일갈한다.
‘평민 총서기’가 갈 길은 멀고도 험해 보인다.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 간의 갈등은 좀처럼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를 빌미로 거세게 일고 있는 중화애국주의, 중화민족주의가 패권주의로 치달을까 우려된다. 그가 ‘중화패권주의’를 추구하려는 유혹을 떨쳐버리고,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에 기여하는 큰 인물이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