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현의 중국이야기] 도산 선생은 왜 중국에 ‘이상촌’ 건설을 꿈꾸었나?
안창호(1878~1938) 선생은 일생 동안 미국, 중국, 러시아, 멕시코, 필리핀 등지로 떠돌면서 ‘이상촌(해외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고군분투하였다. 체포와 옥고를 거듭하다 결국 60세를 일기로 경성 제국대학 병원(현 서울대학 병원)에서 간경화로 서거하였다. 그가 첫 번째 밟은 땅은 미국이었다. 그는 1902년 부인 이혜련 여사와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이 후 미국 땅에서 모두 13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 그 후 다시 중국에서 긴 세월을 유랑하며, 이 곳에서 이상촌 건설의 꿈을 불태웠다. 1910년에 유명한 ‘거국가(去國歌)’를 읊으면서 중국 망명길에 오른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나 간다고 설워마라. 나의 사랑 한반도야.… ?내가 가면 영 갈소냐. 나의 사랑 한반도야.”
이 때 그가 처음 밟은 땅은 중국에서도 살기 좋고 아름답기로 유명한 옌타이(煙臺), 웨이하이(威海), 칭다오(靑島) 등이었다. 오늘날 청도 땅은 ‘인천시 청도구’로 불릴 정도로 한국 사람들이 밀집해 살고 있다. 아름다운 해변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와는 기후적으로, 지리적으로, 정서적으로 비슷해 포근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사업차 수교 이전부터 중국에서 살고 있는 이중후(李仲厚, 73세) 씨는 귀국하기 전에 옌타이나 웨이하이의 바닷가에 딱 일 년 만 살아보고 싶다고 하였다. 도산 선생도 이국 땅의 아름다운 풍광을 바라보며 객수(客愁)를 달랬을 것이다. 이 때 그가 중국에서 보낸 기간은 고작 몇 개월에 불과하였다. 본격적으로 중국에 머물게 된 것은 1919년 5월 이후였다.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 1932년 ‘윤봉길 의거’ 관련자로 일제 경찰에 체포돼 국내로 이송될 때까지, 자금 모집을 위해 미국에 잠시 머문 것을 제외하고는, 12년 남짓한 기간을 중국에서 보냈다. 미국과 중국에서 모두 4반세기를 보낸 것이다. 그는 왜 그토록 중국에 집착하였는가? 개신교 신도로서 개신교의 땅 미국을 찾았지만 아마도 역시 그의 정서적 고향은 중국이었던 것 같다.
1924년부터 1931년 사이에 안 도산은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동북삼성(만주), 난징, 우시(無錫) 일대를 누비고 다녔다. 같은 해, 중국 난징에 동명학원을 설립하고, ‘동포에게 고하는 글’ 을 집필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숙원하던 만주에서의 이상촌 건설 계획을 포기하고 다시 강남 땅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상은 춘원 이광수가 쓴 <도산 안창호 평전>에 보이는 기록이다.
도산은 해외 독립운동기지로 미국도, 러시아, 필리핀도 탐탁지 않게 생각하였으며 중국을 가장 적절하게 여겼다. 그리고 난징과 가까운 우시라는 도시를 염두에 두었다. 적절한 날을 택해 벼르고 벼르던 우시 땅을 드디어 밟게 되었다. 우시는 어떤 곳인가. 우시는 상하이와 난징의 중간 쯤에 위치한 번화한 도시다. 상하이에서 고속 열차를 이용하면 한 시간 이내에 닿을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우시 역에서 버스로 50분 정도 가면 유명한 타이후(太湖)가 보인다.
춘천이나 화천의 호반 길에 비하면 물 색깔도 탁하고 그다지 큰 호수도 아니다. 중국인의 허풍은 알아줘야 한다. 실눈을 뜨고 풍광을 관조하노라면 그런대로 운치를 느낄만 하다. 버드나무를 따라 자전거 도로가 십 리에 이른다. 그 길이 아름다워 ‘십리방경( 十里芳徑)’이라 하였다. 이 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자연을 즐기는 커플들이 눈에 띤다. 우시는 도산에게는 만주를 대신할만한 이상적인 땅이요 강남의 아름다운 도시였다. 주석(錫)이 나지 않는 땅이라 해서 우시라는 지명을 얻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안창호는 중국(우시)에다 이상촌을 세우려고 했을까?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먼저, 중국인들에게서 깊은 동지적 연대감을 느낀 것 같다. ‘왜구’를 혐오했던 양국 간의 역사적 사건들도 작용했던 듯하다. 이러한 관점은 그가 남긴 글을 보면 보다 선명해진다. 1928년 안창호는 중국의『中央日報』에 <중국 혁명동지들에게 고하는 글(告中國革命同志書)>을 발표하였다. 그것은 북벌(北伐)이 진행 중이던 시기에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성을 규탄하고, 북벌의 성공을 기원하며 한중양국이 결속하여 공동 분투 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아울러 그는 지리적, 정서적으로도 동질감을 느꼈던 것 같다. 중국은 우리와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나라다. 꽤 야박해지기는 했지만, 중국의 농민은 지금도 여전히 시커먼 이를 드러내고 순박하게 웃는다. 그가 이상촌 후보지로 검토했던 미국, 러시아, 필리핀 등은 우선 그 곳 사람들과 얼굴 모습과 피부 면에서부터 확연히 구별된다. 중국인들과 섞여 살면 누가 누군지 도저히 구별할 수 없다. 심리적으로도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중국인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말한다. “한국 사람과 중국 사람은 처음 봐서는 도무지 구별할 수 없다. 입만 꾹 다물고 있으면 중국사람인 줄로 착각한다. 일본사람은 혐오하지만 한국 사람은 좋아한다.”
도산이 지난 세기 초에 꿈꿨던 ‘율도국’, 중국의 남방 도시 우시에도 오늘날 한국 사람들이 진출하여 활기차게 살아가고 있다. 평화시대인 지금은 독립기지가 아닌 삶의 터전인 셈이다. 이들이 몸담고 있는 분야는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소박하다. 거의가 다 생계형 일자리들이다. 한식집, 어학원, 미용실, 된장·고추장 등 한식 재료를 파는 집이 고작이다. 이들은 중국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서투른 중국어를 제외하고는 얼굴도 판박이다. 중국 사람들은 고향 어디에선가 한 번은 본 듯한 얼굴들이다.
한때는 순박했던 사람들이 돈 맛에 취해 인심이 고약해지기는 했지만, ‘바닷물이 모든 하천을 다 받아들인다(海?百川)’는 말처럼 광대한 대륙에서 품어 나오는 온기가 아직은 따스하다. 지구상의 모든 종족을 다 품어주는 것 같다. 아프리카에서 온 남녀 유학생 10여 명이 학교 앞 생맥주 집에서 깔깔거리며 맥주를 마시고 있다. 도로에서 교통정리를 하는 남루한 옷차림의 중국 아저씨와 호주에서 온 두 아가씨가 어색한 중국어로 정겹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퍽이나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