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현 칼럼] 빨대 근성과 줄대기 근성
모기나 거머리는 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산다. 대표적인 혐오 동물이다. 빨대형 인간도 사람의 ‘피(돈)’를 빨아먹고 산다. 빨대형 인간에게도 돼지고기나 쇠고기처럼 등급이 있다. 금빨대, 은빨대, 동빨대라고 이름 붙여도 무방하다. 이들보다 흡입력이 약한 빨대는 ‘가작 빨대’나 ‘장려상급 빨대’들이다. 이 밖에 등급이 떨어지는 빨대들도 ‘푼 돈’이나 챙기려고 거머리나 모기처럼 열심히 빨아야 할 대상을 물색한다.
빨대형 인간들에게는 오징어나 문어와 달리 입에 강력한 빨판이 붙어 있다. 허약한 상대의? ‘가냘픈 목’에 빨판을 대고 열심히 ‘피’를 빤다. ‘피’를 빨린 상대는 금세 혈색을 잃고 온 몸에 발작을 일으킨다. 직접 피를 빨리지 않은 부인이나 자녀들까지도 요동을 친다.
‘피’를 먹고 사는 빨대형 인간들은 한시라도 ‘피’를 빨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본능적으로 흡혈적 속성을 지녔다. 이들에게도 몇 가지 부류가 존재한다.
첫 번째 부류는 ‘좀도둑형 빨대’들이다. 약간의 지위나 권력을 가진 자들로서 불쌍한 아랫사람들의 ‘피’를 빤다. 빨면서도 쥐처럼 힐끗힐끗 눈치를 살핀다. 빠는 범위가 상당히 제한된다. 권력이 미치는 범위 밖에서 피를 빨았다가는 되레 화를 당하기 때문이다. 수하들 중 일부는 조용히 체념하고 ‘피’를 빨린다. 반면에 어떤 자들은 피를 빨리지 않으려고 완강하게 저항을 한다. 비록 저항에 성공하여 ‘피’를 빨리지는 않았을지라도 무서운 보복이 기다리고 있다. 괘씸죄, 좌천, 승진 누락 그리고 각종 기회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된다. 차라리 보신을 위해 적당히 ‘피’를 빨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다행이 이들이 빠는 피의 양은 그다지 많지 않다. 죄질도 상대적으로 가벼워서 빠는 자와 빨리는 자가 쉬쉬하면 영구미제 사건으로 남는다. 그러다보니 좀도둑형 빨대는 좀처럼 박멸되기가 어렵다.
두 번째 부류는 ‘의적형 빨대’이다. 부정축재자나 탐욕스런 자의 ‘피’를 빤다. 그리고 활빈당(活貧黨)이라는 미명으로 포장하여 ‘피’를 적절히 서민들에게 나눠준다. 대도무문(大盜無門)! 한때 조세형에게 ‘대도(大盜)’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부잣집만을 대상으로 절도 행각을 벌였기 때문이다. 고금의 독재자들이 처음에는 ‘의적’을 자처하였지만, 결국은 탐욕의 노예가 돼 빨대형 인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근년 들어 가다피, 무바라크 등 몇 몇 독재자들이 비참한 종언(終焉)을 고했다. 독재자들이 빠는 ‘피’의 양은 엄청나서 국가가 거덜날 지경이다.
세 번째 부류는 ‘권력형 빨대’이다. ‘절대 권력’을 등에 업고 닥치는 대로 ‘빨판’을 들이댄다. 권력을 마치 사유물처럼 행사한다. 탐욕의 끝을 도무지 헤아리기 어렵다. 이들은 아류(亞流)의 음흉한 식객을 거느린다. 식객을 먹여 살리려면 상당한 양의 ‘피’가 늘 필요하다. 그래서 ‘피’를 구하려고 늘 헐떡거린다. 아무리 구하고 구해도 모자랄 뿐이다. 그래서 ‘식객들’까지도 부족한 ‘피’를 보태기 위해 발 벗고 나선다. 이른바 충성경쟁이다. ‘피’를 구할 수만 있다면 ‘서민은행’ 뿐 아니라, 심지어는 아프리카 밀림까지 돌아다닌다. 패티김의 노래처럼, ‘그대(피)’ 없이는 한시도 살아갈 수 없다. 피를 빨린 서민들은 영양실조에 걸린 환자처럼 비실비실하며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한다. ‘피’로 뭉쳐진 ‘주군’과 ‘식객’들인지라 저열한 의협심 또한 대단하다. 엉터리 ‘주군’을 위해 감옥행도 불사하는 ‘협객’ 노릇을 마다하지 않는다. ‘피’를 빨린 자들에게 무차별 계란세례를 당하기 일쑤다. 그러나 한결같이 늘 입에 마스크를 쓰고 휠체어를 탄 채 억울하다고 강변한다.
이들에게도 함정과 덫이 기다리고 있다. ‘줄대기 형’ 인간들이 ‘빨대’들을 가만 놔두지 않는다. ‘권력형 빨대’들에게 죽기살기로 접근한다. 서로 이해관계가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진다. 빨대형 인간과 줄대기 형 인간 군상이 서로 만나 “형님!”, “아우님!”하며 등을 토닥거려준다. 그러다가 수가 틀리면 줄대기형 인간들은 비밀장부를 들춰내 낱낱이 폭로한다. 이들에게 ‘의리’란, 눈곱만큼도 찾아 볼 수 없다. 악과 악이 공생하여 거악(巨惡)을 낳는다.
서민들의 가슴을 멍들게 한 77세의 ‘빨대형 인간’, 이상득은 지금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 극에 달한 ‘노탐(老貪)’을 주체하지 못하다 화를 자초하였다. 매일 유사한 논조로 각 신문 사설에서 ‘상왕(上王)’ 이상득을 규탄한다. 측근과 심복들도 피를 너무 빤 모기처럼 체중을 이기지 못하다가, ‘성난 군중’들의 두 손바닥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 납작하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국민의 공분(公憤)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그토록 그에게 매달리며 줄을 댔던 줄대기형 인간들은 안녕하실까.
이 추한 모습들을 언제까지 봐야하나. 앞 사람들의 무수한 시행착오를 목도하고도 이를 답습하니 안타까울 노릇이다. 누구에게 돌을 던질 것도 없다. 파렴치한 ‘노인’ 한 두 사람을 탓하기에 앞서, 우리 모두에게 깊이 뿌리박힌 ‘빨대 근성’, ‘줄대기 근성’을 탓해야 한다. 아침부터 정 둘 데 없는 ‘짜장면 나라’에서 ‘피 타령’을 하여 왠지 마음이 어둡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