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현의 중국이야기] 향기와 악취, 타오싱즈와 유영구
“부끄러운 등록금 횡령, ‘행동하는 지성’이 그립다”
타오싱즈(陶行知)와 전 야구협회 총재 유영구 씨의 구속을 바라보며
전 야구협회 총재이자 한 사학재단의 이사장 유영구(65세) 씨에게, 법원에서 교비 2500억 원에 대한 횡령 및 배임죄를 적용하여 징역 7년을 선고하였다는 공분(公憤)할 소식이 들린다. 편의점에서 졸린 눈을 치켜뜨고 밤을 새워가며 등록금을 마련한 학생들의 심정은 어떠할까.
그의 부친은 지난 시절 통일원장관을 지냈던 명망가였다. 부친은 기독교 정신에 터하여 학교를 세웠다. 아버지가 애써 세운 학교를 아들이 상당히 말아먹은 것이다. ‘진리를 탐구하고 인류를 위해 봉사하라’는 학원의 건학이념을 이사장은 잠시 망각한 것 같다.
유영구 이사장이 몸담고 있는 학교는 등록금이 연세대, 이화여대에 이어 상위 3위에 든다고 하였다. 엉뚱한 부분에서 상위 랭킹 3위를 기록한 것이다. 이렇게 거둬들인 학부모의 피 같은 돈을 육영사업에 활용하지 않고, 물 쓰듯 야구장에 마구 퍼다 부은 모양이다. 본말이 전도돼도 한참 되었다. 상아탑을 지켜야 할 사람이 프로 야구장을 지킨 것이다.
2500억이란 돈의 규모에 대해서 도무지 상상이 가질 않는다. 이 액수는 자그마치 학교 재학생 6000 여 명이 6년 동안 무상으로 다닐 수 있는 어마어마한 돈이라고 한다. 하고 싶은 공부를 못하고 피켓을 들고 오늘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등록금 인하!”를 외치는 학생들의 ‘울부짖음’이 애처롭다.
우울한 소식 등으로 마음이 답답한 이즈음 ‘행동이 곧 앎의 시작(行是知之始)’이라고 외쳤던 중국 민중의 사표, 타오싱즈(1891~1946)가 새삼 그리워진다. 타오싱즈는 안휘성 휘주(徽州)사람이다. 세인들은 그를 ‘행동하는 지성’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금릉대학 문학과를 졸업하고 1914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진보주의 교육사상가 존 듀이(John Dewey) 밑에서 공부하였다.
1917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머리를 스포츠형으로 깎고 옷도 평민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생활이 곧 교육’이라는 듀이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옮겼다. 곧바로 향촌 교육사업과 농촌 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 효장(曉莊) 사범학교, 육재(育才)학교, 사회대학 등을 설립하였다. 효장 사범학교는 그가 군벌 풍옥상(馮玉祥)과의 사적인 교분으로 인해, 장제스에게 미운 털이 박혀 폐교 조치를 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베이징 대학 총장이던 차이위안페이(蔡元培)와 함께 ‘중화교육개진사(中??育改?社)’를 창립하여 총간사를 맡았다. <전국 향촌 교육 개조 선언문>을 발표하였으며, <<중국 교육 개조>> 등과 같은 저작을 남겼다. 아울러 ‘중국 인민구국회’와 ‘중국 민주동맹회’를 이끈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그의 본명은 원래 타오원쥔(陶文濬)이었다. 대학 시절 양명학에서 가르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정신을 중시하여 이름도 타오즈싱(陶知行)으로 바꾸었다. 43세 되던 해에는 말 보다는 행동이 앞서야 함을 깨닫고 타오싱즈(陶行知)로 개명하였다.
금년은 타오싱즈(1891~1946)가 탄생한 지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 10월 17일, 강소성 정부와 남경시가 공동으로, 그가 창설한 남경 효장 사범대학에서 탄신 12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가졌다.
타오징(陶靜, 63세)여사는 타오싱즈 선생의 차남, 타오샤오광(陶?光)의 딸이다. 할아버지 탄신일을 맞는 타오 여사의 감회는 남다르다.
“할아버지는 자녀 교육에 매우 엄격하셨지요. 아버지께 남긴 서신에 보면 ‘절대로 거짓과 타협하지 말라’고 편달하셨어요. 비록 할아버지를 생전에 뵌 적은 없지만 집안 곳곳에 그의 가르침과 자취가 남아있어요. “
타오싱즈가 남긴 글은 행동으로 뒷받침되었기에 여전히 생동력이 있다.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가르쳐 진리를 깨우치게 해야 한다.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배우고 닦아 참된 사람(眞人)이 돼야 한다(千敎万敎 敎人求眞. 千學萬學 做眞人).”
이것이 그가 자녀에게 남긴 교훈이요, 가르침이다.
타오샤오광은 무선전기 분야에 특출한 재능을 가졌으나 이렇다 할 정규학력을 갖추지 못했다. 그는 1940년 말 청뚜(成都)의 한 무선전기 회사에 취직하였다. 회사 측은 그에게 학력 증명서를 요구하였다. 어쩔 수 없이 육재학교 교장이던 마뤼셴(馬侶賢)에게 도움을 청하자 즉각 졸업장을 만들어 부쳐왔다. 충칭에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타오싱즈는 즉각 그 졸업장을 돌려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차라리 백수로 지낼망정 가짜 수재(秀才)가 돼서는 안 된다. 학위의 노예가 되지 마라. 진리를 추구하고 바른 사람이 되라.”
당시 만연하던 학벌 중시 풍조에 일침을 가하였다. 타오싱즈는 모두 네 명의 아들을 두었다. 막내아들이 상해 교통대학을 다닌 것 외에는 모두가 공식적인 학교에 다닌 적이 없다.
타오샤오광은 정력을 기울여 선친의 전집 간행에 심혈을 기울였다. 전집이 출간되고 나서 원고료로 4만 여 위안을 받았다. 막대한 돈이다. 그는 졸지에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후에 형제, 자녀들과 상의하여 원고료로 받은 전액을 2회에 걸쳐 타오싱즈연구회에 기부하였다. 그리고 자녀들로부터 ‘기부 행위를 지지한다’는 서면 동의를 받아냈다.
타오징 여사는 묵묵히 30 여 년 간 중등학교 교사를 지냈다. 교단에 있는 동안 단 한 번도 할아버지의 이름을 들먹인 적이 없었다고 고백한다. 퇴직 후 할아버지의 정신을 알리는 것이 그의 책임이요, 삶의 일부분이라고 하였다. 틈틈이 컴퓨터를 배워, 할아버지가 부친에게 남긴 228통의 편지를 컴퓨터 안에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유방백세, 유취만년(流芳百世, 遺臭萬年)’이라는 말처럼, 유영구 씨는 단군 이래 최대의 사학비리 주범으로 역사에 오점을 남겼다. 그를 보면서, 명예와 부귀를 버리고 무명의 청빈한 삶으로 돌아간 타오싱즈의 아들, 타오샤오광이 더욱 빛나 보이는 것은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