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현의 중국이야기] 영원한 왕따 한유에서 ‘태두’ 유래

‘태두(泰斗)’란 용어는 국어사전에 의하면, ‘어떤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간략히 기술돼 있다. 이 설명만으로는 다소 부족한 느낌이 든다. 일반적으로 이 말은 예술이나 사상, 학문 분야 등에서 독창적 계보를 이루었거나 독보적 업적을 남긴 인물을 지칭한다. 이와 일맥상통하는 용어로 조종(祖宗), 비조(鼻祖), 개산조사(開山祖師), 거성(巨星), 거목(巨木), 최고봉(最高峰) 등이 있다.

민족 사학계의 태두, 현대 문학계의 태두, 한국 미술계의 태두 등과 같이 다양한 영역에서 이 용어를 즐겨 사용한다. 과연 태두란 말은 어떻게 유래되었는가? 태두란 본래 ‘태산북두(泰山北斗)’에서 나온 말이다. 옛 사람들은 태산을 만산 중 으뜸으로 꼽았으며, 북두란 뭇 별들 중 지존의 위치에 있는 ‘별 중의 별’을 가리켰다.

태두란 용어는 점차 산과 별을 지칭하는 용어에서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로 바뀌어 사용되었다. 곧 학문이나 사상의 창시자, 특정 분야에서 명망 있는 인사, 영향력 있는 인물을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다.

태두란 당대(唐代)의 문인, 한유(韓愈, 768~824)와 깊은 관련이 있다. 한유는 누구인가? 그는 당나라의 문장가·정치가·사상가이다. 당송 8대가의 한 사람으로 자는 퇴지(退之), 호는 창려(昌黎)이며 시호(諡號)는 한문공(韓文公)이다. 하남성 남양(南陽) 출신으로, 우리에게는 ‘퇴고(推敲)’의 고사로 익숙한 인물이다. <신당서(新唐書)> ‘한유전’의 기록을 살펴보자.

“당대의 문장가 한유는 고문에 능하였고, 그의 문장은 널리 전파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높여 ‘태산, 북두’라고 칭하였다. 이 말에는 그를 칭송하고 기리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오리지널’ 태두는 오직 한유 한 사람 뿐인 것이다. 그는 우매하리만치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좌천과 유배, 복직을 반복하였다. 고광민이 번역한 <자를 테면 자르시오>(태학사)라는 책에 그의 성품과 사상의 편린을 엿볼 수 있다.

역자는 한유의 성품을 이렇게 평하였다.

“그는 부드럽지 않고 딱딱하며, 세련되지 않고 거칠어 세상과 조화하지 못하는 외골수다. 직선적으로 말하면 타협할 줄 모르는 저돌적인 ‘또라이’라고 할 수 있다.”

다소 거칠게 표현하긴 하였지만 대학자요, 거유(巨儒), 한유의 독특한 풍모를 느낄 수 있다. 한유는 과거 시험에 행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19세부터 과거 시험에 집착하였으나 6~7차례 고배를 마셨다. 28세에 경제적인 이유, 명문세가 출신이 아닌 현실적 한계 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과거 시험을 포기하였다.

허난성(河南省)의 카이펑(開封)에서 관료생활을 시작한 그의 인생행로는 불운의 연속이었다. 우직한 성품, 비타협적인 성격, 당당한 태도가 그를 ‘왕따’로 만들었다. 상사와의 마찰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이로 인해 일생을 좌천과 강등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시름을 학문과 글쓰기로 달랬다.

후대에 들어 ‘태두’라는 말은 더 이상 한유만의 독점물이 아니었다. 어느 분야에서 명망이 있거나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을 사용하는 보편적 용어로 탈바꿈한 것이다. 가끔 어중이떠중이, 선무당, 반풍수들이 ‘태두’나 ’창시자‘를 자처한다.

몇 해전, 길에서 만난 40대 중반의 해군 군의관이 명함을 건넸다. 그는 광동성 출신이고 성이 복성(複姓)인 순우(淳于)이다. 주식으로 재산을 탕진했다며 한숨을 지었다. 그가 건넨 명함에 ‘기공 체조의 창시자’라고 적혀 있었다. 창시자를 자처한 것이다. 과장된 듯한 표현이 꽤 거슬렸다. ‘기공’을 통한 심신단련의 역사가 이 군의관 이전에는 없었던 말인가.

‘태두’나 ‘개창자’, ‘창시자’라는 말은 본인이 함부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후세들이 업적을 가지고 평가하는데, 버젓이 명함에 ‘창시자’라고 써서 들고 돌아다니는 젊은 중국 군의관의 만용을 보는 게 씁쓸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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