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현 칼럼] 도연명의 삶, 어느 정비공의 삶

“내 어찌 쌀 다섯 말 때문에 허리를 굽히랴!”

보통 사람들은 여러 이유로 쉽사리 일을 내려놓지 못한다. 그러나 고금의 인물 가운데, 욕심을 버리고 본심을 좇아 미련 없이 산과 들로 떠난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제부터 자유로운 영혼, 도연명(365~427)과 어느 전직 정비공의 삶을 말하려 한다.

도연명에 관한 기록은 <진서 도잠전>(晋書 陶?傳), <송서 도잠전>(宋書 陶?傳) 등에 보인다. 국내에서 도연명을 다룬 책, 몇 권을 소개하자면 이치수 역주 <도연명 전집>, 지세화 편저 <이야기 중국문학사>(상, 하), 홍문숙ㆍ홍정숙이 엮은><중국사를 움직인 100인>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이치수가 역주한 <도연명 전집>에는 70편 가량의 작품이 수록돼 있으며, 역주자가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흔적이 역력하다. 이 책의 말미, ‘전원(田園)과 은일(隱逸)의 시인, 도연명’에 그의 행적이 상세히 드러난다.

도연명은 강주(江州) 심양(?陽, 강서성 구강시 九江市) 사람으로, 오류(五柳) 선생으로도 불렸다. 동진(東晋, 317~420) 말에서 송(宋, 420~479)초를 살다 갔다. 책 읽기를 좋아했고, 술과 이웃, 친구를 가까이했으며, 거문고를 즐겨 탔다. 조용하고 말수도 적었다. ‘영목’(榮木), ‘귀원전거’(歸園田居) 등을 포함하여 여러 작품 가운데서, 그 스스로 “세속에 영합하지 못하는 고루한 성품을 타고났다”고 밝혔다.

슬하에는 배다른 아들을 포함하여 다섯 아들을 두었다. 29세에 강주 좨주(祭酒)로 관리 생활을 시작하였다. 좨주란 벼슬은 시대에 따라 매우 복잡한 성격을 띤다. 이 시절 좨주란 강주 자사(刺史)를 도와 치안, 세금, 호구, 제사, 농잠, 치수, 병기 등을 관장하는 지방의 요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난 성격 탓에 주위의 모욕을 못 참고 곧 물러났다. 이어, 주부(主簿 *고대 관직 일람표 근거, 정9품)로 다시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35세에 환현(桓玄 *반란을 일으켜 楚 건국)의 참군(參軍 *참모 군무의 간칭), 40세에 진군(鎭軍)장군, 유유(劉裕, 환현 진압, 남조 宋의 초대 황제)의 참군이 되었다. 참군이란 장군의 참모를 말한다. 이렇게 볼 때 참군이란 벼슬은 장군과 늘 소통할 수 있는 주요 직책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십수 년 후, 모시던 장군이 황제가 됐으니, 만약 도연명이 출세를 꿈꿨다면 앞길이 활짝 열렸을 것이다. 이 무렵 그가 지은 유명한 시가 ‘처음으로 진군 장군의 참군이 돼 곡아(*현 강소성 丹陽)를 지나며 짓다’(始作鎭軍參軍經曲阿作)이다. 서기 404년, 도연명이 40세 때의 일이다. 시의 일부를 감상해보자.

“젊어서부터 세상사 밖에 뜻을 두고, 거문고와 책에 마음 맡겼느니/ 거친 베 옷 입고도 스스로 만족하였고/ 자주 쌀독 비어도 항상 마음 편하였다/ 기회가 참으로 우연히 찾아와 고삐를 돌려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중략) 잠시 전원과 멀어지게 되었다/ 아득히 멀리 외로운 배 떠나니/ 끊임없이 돌아오고픈 마음 휘감긴다. (중략) 마음은 산수 속 내 집을 그리워 한다”(이치수, 위의 책, 126쪽)

다시, 41세에 건위(建威)장군, 유경선(劉敬宣)의 참군이 되었다. 이 해 유경선이 사직하자 그도 고향으로 돌아갔다. 벼슬 생활은 대부분 길어야 1년 아니면 반년에 불과했다. 천성이 얽매이는 것과 남의 밑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했던 것 같다.

가난은 늘 그를 괴롭혔다. ‘걸식’(乞食)이라는 시의 일부를 옮겨본다.

“굶주림이 나를 밖으로 내몰지만 도대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구나/ 가고 가다 이 마을에 이르러 문은 두드렸으나 말을 더듬는다/ 주인은 내가 온 뜻 알아차리고 먹을 것을 주니 헛걸음은 아니구나(중략) 그대의 표모(漂母)와 같은 은혜에 감사하지만, 난 한신 같은 인재가 아니라 부끄러울 뿐.”(위의 책, 80쪽)

도연명에게는 가난이 천형처럼 따라 다녔으나 본성과 예의, 염치만은 잃지 않았다. 가난에 찌든 그를 안타까이 여긴 숙부, 도규(陶逵)의 추천으로 고향에서 가까운 팽택현(彭澤縣)의 현령이 됐으나 얼마 못가 사직하였다. 굽힐 줄 모르는 자존심이 늘 문제였다.

“상급 기관에 속한 감찰관 독우(督郵)가 현에 당도하자, 아랫사람들이 의관을 갖추고 정중히 영접할 것을 재촉하였다. 그는 ‘내 어찌 쌀 다섯 말 때문에 마을의 어린아이에게 허리를 굽히랴’(我豈能爲五斗米折腰向鄕里小兒(진서 도잠전)”며 자리를 내던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렵게 취직한 지 80여일만의 일이다.

이후 저작랑(著作郞)으로 재차 부름을 받았지만, 다시는 관직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만년에 남조시대의 막을 연 옛 상관, 유유(劉裕)가 송(일명 劉宋)을 건국하자, ‘잠(潛)’으로 개명한 뒤 세상과 철저히 담을 쌓았다. 이름까지 바꾼 걸 보면 유유를 무척이나 싫어했던 것 같다.

그 후, 고향에서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다하였다. 국화도 가꾸며, 밭일도 하고 누에도 치며 땀을 흘렸다. 책을 읽고 홀로 술잔을 기울이다 흥에 겨우면 거문고를 탔다. 술에 취해 산보하며 시를 읊었다.

귀거래사(歸去來辭), 오류선생전, 도화원기(桃花源記), 음주, 귀조(歸鳥), 연우독음(連雨獨飮), 지주(止酒), 만가시(挽歌詩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 등 불멸의 작품을 남겼으며, 현재 139편이 전한다. 그의 작품에는 책, 술, 거문고, 가난, 친구, 국화, 새, 고향, 전원 등의 시어가 등장한다. 자유와 고독이 흠씬 느껴진다.

전원시인의 낭만적인 일상의 이면에는 혹독한 가난, 게으른 다섯 아들에 대한 한탄, 술 없이 잠 못 드는 밤, 술을 끊으려는 몸부림, 무능한 가장의 고뇌, 출세하지 못한 아쉬움 등이 짙게 배어 있다. 그는 이렇게 22년을 고향의 아름다운 정취에 젖어 지내다 63세에 타계하였다. 비록 궁핍한 생활이 그를 힘들게 했으나, 숙원하던 전원에서 삶을 마쳤으니 여한은 없을 것이다.

이제 어느 전직 정비공의 삶을 들여다보자. 종합편성 채널에서 방영하는 ‘갈 데까지 가보자’라는 프로그램을 보았다. 화면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이름은 조영운(45)씨다. 8년 전에 전남 영광의 산골에 혼자 들어와 산다. 당나귀 두 마리, 조랑말, 검정개와 함께 지낸다. 당나귀의 이름은 명귀, 명순이, 조랑말의 이름은 정국이다. 당나귀 목욕시키느라 외로울 틈이 없다.

때때로 집 아래 선녀탕에 내려가 몸을 담근다. 입가에 시종 여유로운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삼겹살에다 직접 기른 산양 삼을 싸서 먹고, 라면과 함께 넣어 끓여 먹기도 한다. 당나귀를 타고 산보하는 그의 표정이 무척이나 행복해 보인다. 활터를 만들어 놓고 활쏘기를 즐긴다. ‘만능 손’으로 못 만드는 것이 없다. 심심하면 직접 만든 배를 끌고 호수로 내려가 낚시를 즐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산 속에 있으니 돈도 필요치 않고 욕심마저 떠나버렸다.”

그는 한 때 솜씨가 꽤 뛰어난 정비사였다. 정비소 운영을 잘해 장사도 그런대로 잘 됐다. 어느 날 갑자기, 수리비를 좀 더 받고 싶어 매번 양심을 속여야 하는 자신의 직업에 깊은 회의를 느꼈다고 털어놓는다. 그의 말을 듣자, 통통한 얼굴에 빨간색 실로 짠 빵떡모자를 눌러쓴 한의사가 맞장구를 친다.

“맞습니다. 나도 한의사이지만, 솔직히 말해 환자들이 돈으로 보입니다. 30만원 받을 걸 60만원 청구하고 싶죠. 내가 돈 버는 기계도 아니고…. 가끔 내 자신이 파렴치한이 아닐까 생각도 해봤죠.”

어느 예비역 대령이 퇴역한 날, 평생 복종만 하다 늙어버린 자신의 지나온 삶이 한스러워 펑펑 울었다고 한다. 이에 비하면, 자유를 찾아 떠난 조영운씨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조영운씨뿐만이 아니다. 매일 악취 나는 썩은 이를 들여다보던 일에 염증을 느낀 치과의사가 간판을 바꿔달고 분식집 사장이 됐다. 앞치마를 두른 그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은퇴를 앞둔 저명한 신문사 김모 기자는 이미 은퇴 준비를 마친 것 같다. 직접 만든 아담한 통나무배를 작은 차 위에 싣고 부인과 함께 맑은 강을 찾아다닌다.

대기업을 박차고 나와 홀로 서기에 성공한, 어느 젊은 작가의 표정을 보니 자신감이 물씬 피어오른다. 독일 박사학위를 소지한 어느 철학자도 도시의 찌든 때가 싫다며 자연으로 돌아갔다. 흙집 학교를 세워, 흙집 알리기에 여념이 없다. 아이들을 데리고 오지에 둥지를 튼 젊은 한의사 부부도 마음이 여유로워 보인다.

인생은 양파 껍질 같아서 추구하고 추구해도 끝이 없다. 아침 이슬처럼 너무도 짧다. 기다리고 미루다가는 자유와 행복은 요원하다. 잠시 일손을 내려놓고 쉬어가면 어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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