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현의 중국문화산책] 공사 구분 못하는 김기춘의 ‘절대충성’

공사 구분 못하는 ‘절대충성’

위 글귀는 <전국책(戰國策)>, <사기 ‘자객열전’·‘예양(豫讓)편’> 등에 보인다. 예양은 지백(智伯)이 총애하던 신하다. 지백은 진(晋)을 좌지우지했던 인물이다. 인기 사극, ‘기황후’의 대승상 연철만큼이나 세력이 강성했던 것 같다.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다. 지백은 한·위·조(韓魏趙)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고 멸문(滅門)의 화를 당했다. 이 전투에서 기사회생했던 조의 양자(襄子)는 지백을 몹시 증오하였다. 둘이 한솥 밥을 먹을 때 지백이 억지로 술을 먹이고 뺨을 때리며 괴롭혔기 때문이다. 그는 지백의 두개골에 옻칠하여 거기에 대고 오줌을 누며 한(恨)을 풀었다. 산으로 달아난 예양은 복수를 다짐하며 탄식한다.

“아! 사나이는 자기를 알아주는 자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인은 자신을 기쁘게 해주는 사람을 위해 얼굴을 가꾼다(士?知己者死,女?悅己者容). 지백은 나를 선비로 대해줬다. 내 반드시 지백의 원수를 갚아주리라.” (<전국책>, 임동석 역, 고려원, 31쪽)

예양은 상갓집 개처럼 이곳저곳을 떠돌다 지백을 만났다. 지백은 예양을 범상치 않은 인물로 보고 ‘국사(國士)’로 대접하였다. 예양은 자신을 아끼고 극진히 대접했던 지백을 잊을 수 없었다. ‘자객열전’·‘예양(豫讓)편’에 나오는 예양의 ‘처절한 복수 고사’를 간추려 보자.

예양과 지백의 고사

예양은 이름을 바꾸고 죄인들의 무리에 끼어 조 양자의 궁중에 들어가 변소의 벽을 바르는 일을 한다. 어느 날 조 양자가 뒷간에서 볼 일을 보다 가슴이 몹시 두근거리며 살기(殺氣)를 느꼈다. 이에 죄수들을 신문(訊問)하는 중에 비수를 품은 예양을 발견하였다. 그가 지백을 위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양자는 예양을 의리 있는 선비요, ‘현자(賢者)’로 여겨 풀어준다.

첫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자, 예양은 몸에 옻칠을 하고 숯가루를 먹어 목소리조차 바꿨다. 그의 모습은 몰골이 일그러진 행려병자나 다름없었다. 예양은 다리 밑에 숨어 양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가 다리 앞에 이르자 놀란 말이 두 발을 높이 들며 멈춰 섰다. 양자가 수하를 시켜 다리 밑을 수색하던 중 문둥이처럼 위장한 예양을 발견하였다. 그를 잡아 캐물었다.

“그대는 어찌 지백만을 위해 이토록 끈질기게 복수하려 하는가?”
예양이 답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그저 그런 사람으로 대하였소. 그러나 오직 지백만이 나를 ‘국사(國士)’로 대접하였소. 따라서 나는 국사로서 그에게 보답하려는 것이오.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소. 그대의 의복을 얻어 그것만이라도 베어 복수의 마음을 청산하고 싶소.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소.”

양자는 크게 감동하여 하인을 시켜 자기 의복을 가져 오게 하였다. 옷이 도착하자 예양은 칼을 뽑아 세 번을 뛰어올라 옷을 베었다. “이 사실을 지하의 지백에게 보고하리라.” 울부짖고는 칼에 엎어져 자결하였다. 조나라의 지사들은 이 말을 전해 듣고 모두 눈물을 쏟으며 울었다. (<사기>, 김진연·김창 편역, 서해문집, 222~227쪽).

조 양자는 그를 ‘예자(豫子)’로 받들고 칭송하였다. 예양의 고사는 너무나 극적이고 가슴 뭉클하여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우리와 일본 역사에도 ‘주군과 가신’들의 감동적인 스토리가 존재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추운 겨울날이면, 주군 오다 노부나가의 짚신을 가슴에 품어 따뜻하게 하였다. 김옥두(77)의 DJ에 대한 충성심도 거의 ‘신앙’에 가까웠다. 그는 김대중을 33년간 그림자처럼 섬겼으며, 히데요시 못지않은 충성심을 보였다.

권력자 향한 아부, 공조직 무력화 초래

‘‘士? 知己者死!’’ 얼마 전, 김기춘(76) 비서실장이 이 글귀를 사용해 다시금 화제로 떠올랐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 1주년을 맞아, 청와대 비서진이 ‘롤링 페이퍼’를 액자에 담아 박 대통령에게 전달하였다. 김 실장이 쓴 글귀를 포함하여, 롤링 페이퍼에 써 넣은 글귀들은 참모 개개인의 각오가 담겨 있다.

김 실장의 결연한 표현에서 ‘예양’과 같은 비장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지금은 ‘군주 1인’에 충성하는 왕조 시대가 아니다. 비서실장 자리는 ‘개인’에게 충성함으로써 시혜나 봉록을 받는 자리가 아니다. 고달픈 민초들의 고혈로 만들어진 자리다. 조선의 청백리처럼 추상(秋霜) 같은 기개로 목을 걸고 직간(直諫)하는 자리여야 한다. 그를 비롯한 비서진들이 과잉 충성으로 치닫지 않기를 고대(苦待)할 뿐이다.

우리사회 공조직 가운데 검찰 조직이 가장 가파른 위계질서 사회인 것 같다. 작년 9월, 김윤상(45) 대검찰청 감찰과장이 검찰총장의 ‘호위무사’를 자처하며 사퇴했다. “차라리 전설 속의 영웅, 채동욱의 호위무사였다는 사실을 긍지로 삼고 살아가겠다.” 사퇴의 변이 다소 생뚱맞다.

당시 상황에 비추어 김윤상(45)의 상관에 대한 의리와 충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검찰은 사조직이 아니다. 그는 엄연히 ‘국민’이 임명한 공직자다. 그의 돌출 행동은 ‘협객(狹客)’이나, 협량(狹量)의 그것으로 비쳐진다.

그가 검찰총장 한 사람을 염두에 두고 사용한 이 글귀는 음미할수록 씁쓸함이 느껴진다. 사립학교 교장이나 법인국장이 재단 이사장에게 이런 ‘우직한’ 표현을 한다면 이해가 된다. 이사장 한 사람이 이들의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진정한 공복(公僕)의 도리가 무엇인지 되묻고 싶다.

청와대를 비롯하여, 검찰·경찰·국정원·군대 등과 같은 ‘절대 충성’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구성원의 가치관이 흐려지면, 직속상관 일개인에 충성하는 ‘사조직’으로 전락하기 쉽다.

십여 년 전, 한 원탁에서 동료 및 상사와 오찬을 함께 했던 기억들이 새롭다. 그 때 머리가 하얗게 센 ‘2인자’ 한 사람이, 사무라이나 가신들이 보스에게 대하듯 “주군! 주군!”하면서 아부를 떨던 기억이 난다. 참으로 낯간지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1인자와 2인자는 찰떡궁합이었다. ‘백발 아부꾼’의 세치 혀는 오직 ‘1인자’ 한 사람의 등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효자손’ 같았다.

지금 그는 어느 조직의 수장 자리를 꿰찼다. 화면에 비친 그를 볼 때마다 지금도 눈살이 찌푸려진다. 그에게 아부를 받던 ‘1인자’도 지금 또 다른 요직을 맡고 있다. 간, 쓸개를 빼놓고 아부를 하던 사람이나, 아부를 즐기던 사람들이 국가의 요직을 농단하니, 깊은 한숨이 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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