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현 칼럼] 시진핑 시대, 왜 차이위안페이를 주목하는가?②

저장성 사오싱(紹興)에 위치한 차이위안페이의 생가, '만세 모범, 학계 태두'라는 문구가 그의 삶을 대변한다.

‘왜인(倭人)에게 술과 고기를 갖다 바치니… 통곡하지 않을 수 없다’

차이위안페이(蔡元培)는 저장성 사오싱 출신이다. 사오싱은 우임금의 전설이 서려 있는 고장으로도 잘 알려진 곳이다. 치수(治水)에 힘썼던 우임금은, 8년 동안 밖에서 지내며 자신의 집 대문을 세 번이나 지나쳤으나 결코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우임금의 전설은 민간에 대대로 전해지며 백절불굴의 정신을 상징한다. 또한 사오싱은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를 낳은 월왕 구천의 이야기로도 유명한 고장이다.

차이위안페이는 5세 때부터 글방에 들어가서 천자문과 사서오경을 익혔다. 경전을 맹목적으로 외워야하는 봉건체제하의 교육은 그에게 평생 고통스런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가 교육부장관이 되자, 전국 모든 초등학교의 경전 강독 수업을 일제히 폐지함으로써, 아이들을 ‘경전의 늪’에서 구해 주었다.

그의 유년 시절은 유복하였다. 가정교사를 초빙하여 글을 배웠다. 부친 사후에는 가세가 기울어 남의 집에 가서 더부살이로 공부하였으며 이러한 생활은 17세까지 계속되었다. 그의 많은 스승들 가운데 특히 차이위안페이에게 영향을 끼친 인물은 왕자장(王子莊)이었다. 차이위안페이는 13세부터 왕 선생에게서 학문을 익혔다.

왕 선생은 명말 청초의 우국지사 류종주(劉宗周,1578~1645), 여유량(呂留良,1629~1683), 증정(曾靜,1679~1736) 등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류종주는 청조의 회유에도 불구, 벼슬을 사양하며 단식하다 죽었다. 여유량은 청조의 벼슬을 거부하며 삭발 후 중이 되었다. 증정은 반청조직을 이끌다 처형당했다. 우임금· 월왕 구천 그리고 우국지사들의 정신과 풍모는 차이위안페이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883년 만 15세의 나이에 차이위안페이는 수재(秀才)가 되었다. 수재란 부(府)나 현(縣)에서 거행된 원시(院試) 합격자를 말하며 생원이라고도 한다. 1886~1889년 동향인 장서가 서수란(徐樹蘭, 1837~1902)의 서재에 머무르며 다양한 책들을 섭렵한 결과, 학문이 진보하고, 사상의 폭도 더욱 넓어지게 되었다. 1889년 8월 21세에 향시에 합격하여 거인(擧人)이 되었다.

1890년 22세의 차이위안페이는 베이징에 도착하여 회시(會試)에 응시하였다. 회시는 초시(初試)와 복시(覆試)로 나누어 치른다. 초시만 해도 세 번에 걸쳐 진행된다. 그는 초시를 치르고 나서 실망하여 낙방한 것으로 여기고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다. 그러나 뒤늦게 낭보가 날아들었다. 초시에 합격한 것이다. 재차 베이징에 가서 복시를 치르기에는 시간적으로 촉박했다. 애통하지만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시 2년을 기다려 복시에 응시하였고, 24세에 숙원하던 진사(進士)가 되었다. 차이위안페이는 문장이 출중하여 한림원 편수로 제수(除授)됐다. 1893년 쑨원이 ‘만주족 축출, 중화부흥’의 기치를 들고 흥중회를 결성할 무렵, 차이위안페이는 한림원이라는 폐쇄적인 울타리에 갇혀 지냈다.

그는 주량이 엄청났고 재기가 넘쳤다. 독서를 할 때는 한눈에 10행이 들어왔고, 문장을 짓기로 말하면 한 말 술을 마시는 동안 시 100편을 지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를 열정적이며 호방한 인물로 평가했다. 명대의 문인, 서문장(徐文長)의 기백을 닮았다하여 ‘근세의 ‘서문장’으로도 불렸다.

그가 한림원에 갓 발을 디딜 무렵인 26세에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세가 불리하여 화평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차이위안페이는 강화조약 체결에 반대하고 항전을 주장하는 상주문을 직접 작성하여 조정에 건의했다.

“굴욕적인 화약을 맺으면 국가는 기필코 다시는 떨쳐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손자병법>에도 ‘선전하다 패하면 망하지 않는다(善戰不亡)’고 하였다. 패인을 분석하고 교훈을 도출하여 승리할 비책을 강구해야 한다. 패전의 대가로 땅을 떼어 준다고 하는데 이것은 백성의 고혈을 갖다 바치는 것이요, 조상대대로 내려온 기업을 줄어들게 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하책을 내어서는 아니 된다. ”

차이위안페이가 상주문을 올린 뒤, 일본군이 다롄을 점령했으나 이화원에서는 등불을 밝힌 채 태평스럽게 서태후의 60세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광서제와 조정의 대신들은 사흘을 이렇게 질탕하게 보내며 정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다음 해에 일본군이 산동반도에 상륙하여 북양 해군기지인 웨이하이(威海)가 함락되고 북양 해군이 전멸하였다. 청 조정은 이홍장을 일본에 급파하여 굴욕적인 마관(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하였다. 1895년 4월 17일 <잡기(雜記)> 에 차이위안페이가 울분을 토하던 기록이 보인다.

“청조가 마침내 왜와 화약을 맺었다. 대만, 봉천(심양), 요동 동쪽의 영토를 떼 준다고 한다. 남으로 여순에까지 이르는 방대한 지역이 여기에 해당된다.?…하루에 100리 씩 쪼그라들고 날마다 재앙의 기회가 잠복해 있으니, 한(韓)나라와 위(魏)나라가 진나라를 대할 때나, 송나라가 금나라를 대할 때도 이보다 심하지 않았으리라!

왜인에게 급료를 주고 왜군에게 기름진 고기와 술과 음식을 다 갖다 바치니, 이러고서 결코 오래 버틸 수 없다.?…변경의 신하들이 날뛰어도 정부는 졸렬하고 우둔하여 외우내환이 겹치니 애통할 뿐이다. 부뚜막에 불이 붙어서야 계책을 내니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며 장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구나.”

차이위안페이는 청 정부의 무능과 부패, 간신배들의 국정농단이 망국의 화근임을 인식하였다. 청일전쟁 패배로 인해 제국주의 열강의 압박이 날로 더욱 거세지며 중국은 멸망의 위협에 직면하였다. 청일전쟁의 굴욕적인 패배는 ‘강직한 선비’, 차이위안페이가 한림원 벼슬의 단꿈에서 깨어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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