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길의 시네마 올레길] 종교권력에 필요했던 ‘이단과 마녀’

타이틀 : 장미의 이름 (The Name Of The Rose)
감독 : 장 자크 아노
출연?: 숀 코너리 , 크리스찬 슬레이터
제작국가?: 이탈리아
개봉?: 1989년

1327년 이탈리아 북부 한 수도원

인권과 시민권이 확립되지 않았던 기나긴 시기. 근대 이전 인류역사 내부 구도를 간단하게 이항 대립시키면 지배와 피지배로 나눠집니다. 상위계급 지배자는 부와 품격으로 치장하면서 고급문화와 풍요로운 물질을 향유했습니다. 하위계급 피지배자는 지배계급을 위해 평생 노동력을 바쳤습니다.?지배 계급은 지식과 정보를 독점합니다. 그들은 문자습득을 통해 읽고 쓰고 끼리끼리 소통합니다. 지식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절차도 장악합니다. 진귀한 향신료 보물 황금 청동기구, 강철로 벼린 칼과 창, 화약 총포는 결국 지식과 정보를 더욱 독점하게 하는 필수 도구로 활용됐습니다.

르네상스가 움트기 시작하는 14세기 이탈리아. 신권의 상징인 교황의 절대권위가 서서히 흔들리던 1327년 이탈리아 북부 한 수도원. 이곳은 기독교계 최대 장서관으로 당시 동서고금의 깊고 넓은 지식들을 채록한 방대한 서적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 시대 최고의 기호학자이자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의 대표작??‘장미의 이름’. 이 가상의 수도원이 현대 지식소설의 고전으로 자리 잡은 ‘장미의 이름’ 무대입니다. 1986년 장 자크 아노감독이 원작에 충실하게 영상화 했고, 숀 코너리가 윌리엄 신부 역, 크리스찬 슬레이터가 어린 수사(修士) 아드소 역을 맡았습니다.

수도원에서 연쇄 살인사건이 발생합니다. 희생자들은 수사(修士)들. 교황청은 월리엄 신부를 수사관으로 파견합니다. 영국 출신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에 정통하며 경험주의적 사유를 갖춘 프란체스코파 윌리엄 신부는 조수 아드소와 함께 이 비밀스러운 수도원에 발을 내딛습니다.

두 사람은 수사들의 의혹에 찬 피살마저 신의 뜻으로 돌려버리는 수도원의 권위적 엄숙주의와 맞닥뜨립니다. 살인은 계속됩니다. 체온이 아직 식지 않은 시신이 연이어 발견됩니다. 희생자들은 장서관?책을 다루는 수사들. 월리엄 신부가 수도원의 연쇄살인사건을 본격적으로 추적하자 웅장하고 의혹에 싸인 지식 저장소는 중세의 본질적 모순을 드러냅니다.

인간의 웃음을 통제할 수 있는가

신의 이름을 내걸고 교권을 유지하려는 중세 교회와 수도원은 민심이 들끓을 때마다 마녀사냥과 종교재판을 벌입니다. 수도원은 민중의 땀 위에 건설되었고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했습니다.?‘마녀’ 혐의가 씌워진 민초는 가차 없이 화형 당합니다. 체제에 반항하면 ‘공공의 적’ 이단으로 낙인을 찍어 십자가에 매답니다. ‘이단과 마녀’는 종교권력에 유지하는데 꼭 필요했던 것입니다.

청빈과 금욕을 강조하는 프란체스코 교파는 떠오르는 인문주의와 자연과학을 수용합니다. 프란체스코 교파는 베네딕트 교파가 장악한 ‘있는 자들의 교회’를 비판합니다. 소설과 영화 속에서 프란체스코파와 베네딕트파는 하나님의 뜻과 교회의 위상를 놓고 치열하게 논쟁을 벌입니다.

수도원의 실력자 호르헤 신부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애써 무시하며 중세적 가치 아래 모든 것을 복속시키려 합니다. 그는 지식은 인간을 타락시키며 지식은 발전이 아니라 순환할 뿐이라고 강변합니다. 이에 윌리엄 신부는 인본주의적 사상이 동터 오르는 르네상스가 도래함을 암시하며 대립합니다.

윌리엄 신부는 당시 최고 지식들이 ‘다운로드’되고 재분류되어 새 저술로 ‘업로드’되는 수도원 사본실 안팎을 샅샅이 수색합니다. 사본 수사(寫本 修士) 번역 수사(飜譯 修士)들의 연쇄 피살사건 추적을 통해 맹목적 신앙과 광기는 종이 한 장 차이 일뿐이라는 사실을 증명해보입니다.

맹목적 신앙과 광기는 종이 한 장 차이

결국 호르헤 신부는 인류 수천 년 지식이 켜켜이 보관된 서고를 불태우며, 스스로 죽음의 불구덩이로 뛰어듭니다. 그토록 금기시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 ‘희극’을 움켜쥐고서. 신앙은 근엄해야 하고 신에 대해 두려움을 간직해야 하는데 인간의 웃음은 경박한 재치를 불러일으켜 신의 권위에 도전하게 된다는 맹목적 믿음.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희극’을 후대에 전수시키지 않으면 인간의 웃음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호르헤 신부의 닫힌 믿음이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스러지는 진리는 떠오르는 진리를 막지 못합니다. 동 터오는 질서는 저무는 질서를 대체합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정체된 종교 권력이 한 시대 지식과 정보를 독점 통제하려는 과정을 수도원 연쇄살인사건을 통해 손에 땀을 쥘 만큼 흥미진진하게 드러내줍니다. 21세기 초 변화가 변화를 밀어내는 급변시대. 지금은 무엇이 소멸하고 무엇이 태동하는 시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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