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길의 시네마 올레길] 피를 나눠야만 가족일까

타이틀: 에브리바디 올라잇 (The Kids Are All Right)
감 독: 리사 촐로덴코 (Lisa Cholodenko)
출 연: 아네트 베닝 (Annette Bening, 닉)
줄리안 무어 (Julianne Moore, 줄스)
마크 러팔로 (Mark Ruffalo, 폴)
개 봉: 2010년

1. 피를 나눠야만 가족이 될까

혈연이 없어도 희로애락의 추억을 공유하고 신뢰를 나눈다면 가족이 될 수 있을까. 가족의 정체성에 질문을 던지고 가족의 경계를 새롭게 제시하는 영화 한 편을 소개합니다.

여기 한 가족이 있습니다. 아빠 엄마 누나 남동생으로 이뤄진 전형적 4인 가족이 아닙니다. 깐깐한 완벽주의자 의사 닉(아네트 베닝)과 감수성 넘치는 조경디자이너 줄스(줄리안 무어)는 20년 가까이 부부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레즈비언 커플입니다. 1990년대 초반, 둘은 정자은행을 통해 정자를 기증받아 각각 아이를 낳습니다. 이때 두 사람은 동일인의 정자를 기증받아 임신했습니다. 태어난 두 남매에게 생물학적 아빠는 동일인이고 엄마는 서로 다른 희한한 경우입니다. 누나 조니는 고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대학진학을 앞두고 있습니다. 중학생 레이저는 한창 사춘기를 겪고 있습니다.

닉과 줄스가 꾸려가는 가족 구성은 분명 가족의 범위를 확장한 진보적 커플 형태입니다. 동양사회에서는 아직 꿈도 못 꿀 가족단위입니다. 닉-줄스 부부는 레즈비언 커플임을 남들에게 숨기지 않습니다. 정상부부인 친구들에게 다들 인정받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자식인 조니와 레이저가 자신들의 엄마들을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남매는 두 엄마의 사랑을 이해하고 아빠가 빠진 특별한 가족 구성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수용합니다.

집안 경제를 책임진 닉은 때론 아빠처럼 원칙을 제시하고 아이들을 꾸짖습니다. 큰 딸 조니는 닉의 잔소리를 지겨워하고 제발 어른 대접 좀 해달라고 하소연합니다. 불량한 친구를 사귀고 있는 레이저에겐 행실이 바른 친구를 사귀라고 닥달합니다. 두 엄마 중 엄마 역할을 하는 줄스는 모성애가 넘칩니다. 아이들을 껴안아주면서 아이들의 결정권을 존중하자고 합니다. 훌쩍 커버린 청소년을 키우며 자녀교육에 애태우는 여느 중년부부의 초조함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15살 레이저는 누나에게 자신들의 생물학적 아빠가 누구인지 찾아보자고 채근합니다. 소년에게 아빠란 존재는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고픈 근원성으로 다가옵니다. 남동생의 마음을 읽은 조니는 정자은행에 연락해 자신들의 선한 의도를 밝힙니다. 드디어 아빠의 전화번호를 알게 됩니다.

2. 레즈 커플에게 다가온 틈새

유기농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폴은 독신남입니다. 바로 조니, 레이저의 생물학적 아빠입니다. 쿨한 성격에 은근한 바람둥이입니다. 공부 잘하는 책상물림보다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먼저 저지르는 캐릭터입니다. 폴에게 18살 조니가 전화를 합니다. “생물학적 딸과 아들이 생물학적 아빠를 만나보고 싶어요. 우리 둘은 서로 엄마가 다르지만 두 엄마는 서로 부부예요. 우리의 두 엄마는 정자기증자인 당신의 정자를 통해 각각 우리를 출산했어요.”

폴은 어안이 벙벙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보고 싶습니다. 어색하지만 첫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폴은 생각보다 젊었고 조니, 레이저와 잘 어울렸습니다. 역시 같은 핏줄이라서 뭔가 소통되는 분위기입니다. 특히 사춘기시절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레이저는 폴과 여러 번 만나 진중한 이야기도 나눕니다.

생물학적 아빠를 만났다는 아이들 고백에 닉과 줄스는 적잖이 당황합니다. 더구나 아이들은 1회적 만남이 아니라 다시 만나겠다고 합니다. 부모로서 책임감을 느낀 닉은 폴을 정식으로 초대합니다. 4명이 사는 집안에 결코 남이 아닌 한 남자가 등장합니다. 폴은 의외로 괜찮은 생물학적 아빠로 평가받습니다.

줄스가 직업이 조경디자이너라고 소개하자 폴은 썰렁한 자기집 정원 공사를 의뢰합니다. 경제를 책임지는 닉과 달리 기사를 돌보느라 자신의 직업적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줄스는 이 기회에 성취감을 맛보려 합니다. 대부분의 낮 시간을 들여 폴의 정원을 디자인하고 재배치합니다. 폴은 줄스에게 재능을 칭찬하고 격려해줍니다. 그런데 이 일을 어찌합니까. 줄스와 폴, 둘 사이가 뜨겁게 달아오릅니다. 폴의 끈끈한 시선을 애써 피하려고 하지만 줄스는 스스로 무너지는 자신을 어쩌지 못합니다. 급기야 둘은 한낮 뜨거운 관계를 맺고 맙니다.

3. 가장 강한 힘은 대화

레즈비언 부부에게 불륜이란 사건이 발생되면 두 사람은 어찌 풀어갈까요. 영화는 닉과 줄스가 20여년 부부관계를 유지하고 관리하면서 생겨난 틈을 보여줍니다. 이 틈은 어느 부부일지라도 필연적으로 벌어지는 틈입니다. 인간은 개별자로 태어나 관계를 통해 공동 운명을 영위합니다. 혼자이면서 동행하는 과정. 개별성과 공동성 사이엔 늘 모순이 존재합니다. 늘 출렁거리고 흔들릴 수 있습니다.

폴의 등장으로 흔들리는 가정이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굳게 결속되는 따뜻한 과정을 상큼 깔끔하게 보여줍니다. 레즈 커플도 일반 남녀커플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레즈비언은 어떻게 사랑할까요. 부부싸움은 어떻게 치를까요. 싸움중인 엄마 부부를 지켜보는 아이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에브리바디 올라잇>은 동성애 권리를 주장하는 묵직한 영화도 아니고 인간관계를 비비꼬는 막장 드라마도 아닙니다. 영화보는 내내 시선을 끄는 것은 불륜 사건이 벌어져 갈등이 폭발하는 순간에도 폭력이나 절규가 난무하지 않는다는 점. 너의 입장과 나의 심정을 대화로 풀어갑니다. 솔직한 고백을 하고 드디어 눈물로써 수습합니다.

스토리라인엔 실제로 커밍아웃한 레즈비언으로 정자은행을 통해 출산한 리사 촐로덴코 감독의 산 경험이 묻어 있습니다. 시나리오는 탄탄합니다. 한창 시절 아찔한 미모를 과시했던 아네트 베닝의 주름살은 당당합니다. 한때 스크린에서 팜므파탈적 감성을 내뿜었던 줄리안 무어의 변신도 참 볼만합니다.

조니가 드디어 집을 떠나 대학 기숙사로 들어갑니다. 낯선 도시 낯선 대학 기숙사 룸에 짐을 풀고 헤어질 순간. 네 가족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이별의 눈물을 흘립니다. 때가 되면 자식은 떠나가는데 바로 이 순간 큰 딸을 떠나보내는군요. 돌아오는 길 차안 대화 한 토막.
레이저 “엄마들, 헤어지지 말아요”
줄스 “왜?”
레이저 “헤어지기엔 너무 늙었잖아요”
줄스 “눈물나게 고맙구나. ㅋㅋㅋ”
운전대를 잡고 있는 줄스 손에 닉의 손길이 겹쳐집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이 영화를 ‘관대한 시선으로 그린 현대 가족의 완벽한 초상’이라고 평가합니다. 아이들은 커갑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키우며 세상을 배워갑니다. 문제가 생깁니다. 문제를 직시하며 갈등을 해결하는 법을 깨닫습니다. 가족은 다시 튼튼해집니다. 대안 가족을 지지하는 상쾌한 시선이 물씬. 다양한 관계 다양한 시선을 지지하는 분들께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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