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길의 시네마 올레길] 슬픔에 대처하는 방법
조용한 혼돈 ( Quiet Chaos, 2008 )
감독 – 안토니오 루이지 그리말디 (Antonio Luigi Grimaldi)
출연 – 난니 모레티 (Nanni Moretti)
알레산드로 가스먼 (Alessandro Gassman)
사람마다 갑작스런 이별과 마주쳤을 때 슬픔에 대처하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이탈리아 미디어기업의 중역인 피에트로. 그가 슬픔을 이겨내는 방식을 지켜볼까요. 한 중년남자의 조용한 벤치로 안내합니다.
남동생과 휴가 중입니다.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여인을 얼떨결에 구하게 됩니다. 피에트로는 ‘고맙다’는 인사치레도 듣지 못하고 귀가합니다. 머물고 있는 별장으로 돌아오자 싸늘한 아내의 시신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쇼크사를 당한 것입니다. 아무 상관없는 여인을 구하고 나니 12년을 함께 살아온 아내가 떠나가고 맙니다. 어린 딸 클라우디아는 엄마 곁을 지키지 않았던 아빠를 원망합니다. 참으로 황망합니다. 묵묵히 아내의 장례를 치릅니다.
초등학교에 등교하는 딸의 가방을 챙기고 머리를 서툴게 묶어줍니다. 학교 교문까지 바래다줍니다. 엄마가 죽어가는 현장을 지킨 딸은 의외로 무난하게 일상에 적응합니다. 아직 뭘 모르는 걸까요. 속으로 슬픔을 감추고 있는 걸까요. 피에트로는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간 딸의 곁을 떠나지 않기로 선언합니다. “클라우디아, 네가 수업을 다 마칠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게.” 이제 한 남자가 딸의 학교 앞에서 머물면서 아등바등 매달려 살아온 삶에 잠시 ‘일시정지’ 버튼을 누릅니다.
초록색 벤치에 앉아 학교 정문을 바라봅니다. 신문을 사서 읽습니다. 휴대전화로 회사업무를 처리합니다. 매점에서 커피를 마시고 벤치에서 샌드위치 점심을 먹습니다. 다운증후군 어린이가 엄마 손을 잡고 지나갑니다. 소년은 피에트로의 자동차 리모콘 경적소리에 즐거워합니다. 특수학교로 등교하는 소년이 지나갈 때마다 피에트로는 차 리모콘을 눌러 삑~ 인사를 합니다. 소년은 반갑게 손을 흔듭니다.
큰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미모의 젊은 여인이 지나갑니다. 서로 눈인사를 나눌 만큼 낯이 익어갑니다. 매점 주인과는 식사메뉴에 대해 이야기 나눌 만큼 친해졌습니다. 근처 3층 꼭대기에서 홀로 사는 할아버지는 파스타를 만들어 식사 초대를 합니다.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방문자들은 아내를 잃고 상심에 빠진 ‘학교 앞 피에트로’를 염려해 찾아왔다고 말합니다. 모두 피에트로와 벤치에 나란히 앉아 위로의 말을 건네지만 기실 스스로 고충과 속내를 토로하고 갑니다. 피에트로가 근무하는 회사는 요즘 미국회사와의 합병문제로 시끄럽습니다. 친한 회사동료 장 클로드는 회사 내 파벌간 대립으로 괴롭습니다. 더구나 그의 아내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험한 욕설을 내뱉는 틱 장애 증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클로드는 피에트로를 찾아와 자신의 처지를 털어놓습니다.
원만한 성격의 피에트로를 사이에 놓고 회사 중역들이 전부 찾아와 심경고백을 하고 갑니다.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 덜컥 임신하게 된 덜렁이 처제도 찾아오고 피에트로가 해변에서 구해준 매력적인 여인도 찾아옵니다. 그녀의 낯빛은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합병을 둘러싼 미국회사의 최고경영자도 조용히 들러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하고 갑니다. 어느 순간 피에트로의 벤치는 상처를 고백하고 상처를 위로하는 자리가 됩니다. 피에트로는 그들의 어깨를 다독여줍니다. 쏟아내는 말들을 조용히 경청해주는 벤치는 치유의 출발점이 됩니다.
슬픔이 닥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마음에 상처가 나면 무엇을 기다리고 어디에 매달려야 할까요. 누군가와 정기적으로 주고받은 아내의 메일 목록들을 읽지 않은 채 전부 DELETE 키를 누릅니다. 피에트로는 타인들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풍경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포옹해줍니다. 홀로 읊조리기를 하며 고단한 내면의 결을 가다듬습니다.
해외출장가면서 타본 항공사 이름을 외어보고 자신이 살았던 모든 집주소를 중얼거립니다. 함께 살았지만 아내 라라에 대해 몰랐던 점들을 읊조려봅니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는 곳의 목록, 너무 처참해서 바라볼 수 없는 것들의 목록들을 떠올려보면서 학교 앞 벤치 위에서 전개되는 가을과 겨울 두 계절을 숙성시킵니다. 그 사이 피에트로는 슬픔을 삭혀내고 딸과 함께 본연의 일상으로 복귀합니다.
강한 사람은 없습니다. 곳곳에 약한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온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사방에 무력한 사람만이 있을 뿐입니다. 전부 장애를 품고 있습니다. 건강함을 가장하고 상처를 드러내지 않았을 뿐입니다. 세상은 혼돈의 바다입니다. 다만 ‘조용한 혼돈’일뿐입니다. 혼돈은 종식되지 않습니다. 혼돈을 껴안고 살아내야 합니다.
영화는 종교나 절대적인 맹신에 기대지 않고는 상실의 슬픔을 다루는 데 서툰 현대인의 풍경을 그려냅니다. 표정을 감춘 채 화석화되고 있는 중년남자들의 정서의 선을 잘 뽑아내었습니다. 이탈리아 국민배우이자 명감독인 난니 모레티가 주인공 피에트로로 열연합니다. 그의 절제된 연기와 지적인 분위기는 이 영화를 여운의 자국이 선명한 사색적 작품으로 자리매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