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길의 시네마 올레길]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 되기까지


타이틀 – 화려한 휴가
감독 – 김지훈
출연 – 김상경 안성기 이요원
개봉연도 – 2007년

1. 뉴스 프레임

뉴스를 전하는 미디어는 일정한 프레임(Frame, 틀 짓기, 즉 특정한 방향으로 이슈 규정하기)을 통해 뉴스를 만들고 편집합니다. 뉴스 제목 자체가 뉴스를 바라보는 틀입니다. XX사건을 ‘OO사태’라고 호칭하는 프레이밍(Framing) 자체가 편집 과정이기도 합니다.

뉴스를 듣고 보는 정보수용자도 세상 소식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해당 뉴스 프레임을 받아들입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고 좋은 정보가 되는 소식에는 집중해 귀를 쫑긋합니다. 반면 충격적이고 자신의 현재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는 뉴스에는 이맛살을 찌푸립니다. 즉 자신의 이해관계 호불호에 비춰 순방향일 때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역방향일 때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대형 수입자동차 구매행위를 소비자의 선택권 확대로 보는 프레임도 있고 지구환경 악화에 일조하는 CO2 증가행위로 보는 프레임도 있습니다.

뉴스 프레임은 한 사회의 가치관을 반영합니다. 대중적 정서가 투영되며 뉴스가치의 판단 잣대가 됩니다. 한 사회의 지적 성숙도를 반영하기도 합니다. 민주주의가 확장되고 공동체적 질서가 뿌리내리는 가운데 개인주의적 가치가 보장되는 사회는 뉴스프레임이 다양합니다. 나를 존중하듯이 너의 권리도 존중하는 사회는 나의 시각과 너의 시각이 공존합니다. 서로 담론 프레임이 맞서고 갈등할지라도 비판을 할지언정 비난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2. ‘광주사태’

1980년 5월18일에서 27일까지 호남의 중심 광주 시민들이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며 벌인 민주화운동은 한동안 ‘광주사태’라고 불렸습니다. 1995년 ‘5·18 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 제정이 이뤄지기 전까지 한국사회는 그냥 ‘광주사태’라고 호칭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00사태’라고 일컫는 것은 대단히 부정적인 호명입니다. 사회 안정을 해치는,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돌발적 사변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국회는 1995년 특별법을 제정하면서 ‘5·18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합니다. 1997년엔 ‘5·18 민주화운동’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하고 역사교과서에도 정식명칭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시절동안 1980년 5월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 상황은 누구도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불문율에 싸여 있었습니다. 대신 사건의 진실은 지하 문건과 귓속말로 숨죽이며 흘러 다녔습니다. 1980년 집권 군부세력은 ‘광주를 말하는 자는 국가내란을 획책하는 자’라는 압제 프레임을 드리웠습니다.

당시 제도권 언론들도 입을 다물어야 했습니다. “북괴의 사주를 받는 간첩들이 광주에 침투, 사회불안을 야기하는 폭도들과 야합, 공권력을 탈취, 시민들을 위협하는 무정부 상태가 벌어지고 있다”고 언론들은 열흘 동안 앵무새처럼 반복했습니다.


3. 5·18 민주화운동

12·12사태를 일으켜 군권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는 비상계엄기간 내내 강력한 언론통제를 실시합니다. 그때 서울 광화문 주변 모든 신문사는 인쇄 직전에 시청을 다녀와야 했습니다. 곧 발행될 지면의 대장(臺帳, 기사 사진 제목 등을 거의 실제 신문처럼 제작한 초벌구이 지면)에 대해 시청 주재 계엄군 언론검열관에게 확인 도장을 받아야만 윤전기를 돌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론검열관이 삭제하라고 표시한 기사는 대장에서 들어내야만 했습니다. 광주를 현장 취재한 소식은 원천 삭제되기 일쑤였습니다. 대신 신군부 주의주장이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이 기가 막힌 일들은 1980년 실제 있었던 상황. 신문 방송은 권총 찬 계엄권력 앞에서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내세운 보도지침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미디어들은 총체적으로 무장권력의 앵무새였습니다. 동시에 상상할 수 없는 일이 5월 열흘간 광주에서 일어납니다.

한번 ‘광주사태’로 낙인찍힌 광주는 수십 년 동안 지역적 편견과 네거티브 이미지 한 중간에 갇히고 맙니다.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바라보는 기존 프레임은 오랜 기간 “빨갱이 폭도들이 일으킨 유혈폭동의 난리”라는 극단적 편견으로 꾸준히 존속되어 왔습니다. 좁디좁은 이 땅에서 특정지역을 깎아내려 정치적 우월을 과시하려는 재래식 ‘완장의식’은 웃지 못할 역사의 퇴행이었습니다.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의 일방적 프로파간다와 이에 강제적으로 동원된 미디어에 의해 ‘5월 광주’는 피해자가 가해자로, 시민의 자위권이 폭도의 광란으로, 양심의 표현이 사회불안 야기로 뒤범벅되고 말았습니다.

영화 <화려한 휴가>는 진실을 매몰시킨 채 폭압적 뉴스 프레임만 국민에게 전달됐던 그 암울한 시기를 영상으로 되살립니다. 바로 30여 년 전 대한민국 광주에서 발생했던 10일간의 사건입니다.

4. 왜 총을 들었나

영화 <화려한 휴가>는 계엄군의 무차별 유혈진압에 맞선 시민군 이야기입니다. 신군부의 탈법적 정권탈취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문제제기를 하는 대학생들은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곤봉에 두들겨 맞습니다. 폭력적인 진압에 항의하는 시민까지 봉변을 당합니다. 다음날 늘어난 시민 학생 항의시위 대열. 어디선가 애국가가 확성기를 통해 울려 퍼지자 시위 중인 시민들은 일제히 그 자리에 서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합니다. 이를 신호로 광주 금남로에 도열한 공수부대 M16 총구가 불을 뿜습니다. 같은 나라 같은 민족의 계엄군이 비무장 민간인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사격을 시작한 것입니다. 시위대 그들은 누군가의 아버지, 삼촌, 형, 누나, 동생, 아들, 조카였습니다.

영화는 1980년 시절 격변의 정치상황 구도를 그리지 않습니다. 시민들의 평안한 일상, 그 작은 일상이 어떻게 처참하게 파괴되는 지를 찬찬히 보여줍니다. 실제 ‘5월 光州’를 몸으로 겪고 목격한 시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영화의 표현수위는 실제적 리얼리즘에는 한참 못 미칩니다.

영화 <화려한 휴가>는 다큐멘터리가 아닙니다. 신파조로 흘렀지만 국가 폭력이 시민의 일상을 한순간에 이처럼 무참하게 파괴할 수 있다는 점을 처연하게 드러냅니다. 스토리라인은 정교하지 않습니다. 카메라 앵글로 방대한 역사적 정치적 실타래를 풀려하지 않고 갑남을녀의 일상 프레임에 국한시켰습니다.

방금 대화를 마친 혈육이 주검으로 변해 리어카에 실려 왔을 때, 스스로 광주를 지키지 않으면 모두가 죽는다는 절박함에 시위대는 무장을 합니다. 이제 시민군으로 거듭납니다. 민가에서 주먹밥이 전달되고 교련복을 입은 고교생까지 총을 잡으려 자원합니다.


5. 광주를 왕따시켜라?

1980년대 내내 우리시대 의식 있는 지식인과 문인들은 ‘5월 광주’에 대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죄책감을 느껴왔습니다. 광주에 대한 죄의식은 바로 광주에서 벌어진 그 국가폭력사태에 대해 아무런 항의조차 못하고 침묵으로 일관했다는 무력감에서 비롯됩니다. 문제의식을 자각하고도 그저 침묵했고 자기 안위와 허위의식에 무릎 꿇었다는 양심이 작동된 것입니다.

광주는 결코 특별한 도시가 아닙니다. 한국의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 광주는 5월 그 열흘 내내 외부 소식을 목마르게 기다렸습니다. “광주 시민은 외롭지 않다! 우리 도시도 비정상적 신군부의 탄압에 항의한다! 광주시민을 더 이상 죽이지 말라! 광주시민은 폭도가 아니다! 계엄군은 물러가라!” 이런 소식을 타는 목마름으로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결코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광주소식을 제대로 내비친 뉴스 한 꼭지를 듣지 못합니다. 이미 광주는 대한민국 ‘非광주’ 전체에 의해 ‘폭동의 도시’로 낙인찍히고 만 것입니다. 언론보도의 모든 프레임은 ‘폭동’이었습니다.

광주는 시대의 ‘왕따’ 자체였습니다. 외부로부터 차단당하고 고립무원 속 정권찬탈 세력에 맞서는 그들에게 다가온 것은 ‘빨갱이 폭도’라는 시뻘건 불도장이었습니다. 광주 시민은 말합니다. “무작정 무조건 매도당하는 기분을 아시나요. 아무 소리도 못하고···.”

6. 폭동의 도시로 몰아라

한국 사회에서 ‘빨갱이’란 타의적 낙인은 영원한 타자(他者) 틀짓기입니다. 불구대천의 적(敵)인 것입니다. 권력자가 항거하는 피권력자에게 구사하는 빨갱이 낙인은 전가의 보도입니다.

4·19 혁명의 실마리는 2차례의 마산 의거였습니다. 경찰이 죽여 은닉한 어린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떠오른 것을 계기로 마산의거가 거세게 타오릅니다. 곧장 이승만 정권은 이를 공산주의 빨갱이 불순분자들의 책동이라고 몰아붙였습니다. 결국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하고 부정선거 총책 부통령 이기붕 일가는 집단 자살합니다.

정당성이 결핍된 권력은 진실이 교차하는 지점을 찾아내 붉은 색칠을 시도합니다. 진실이 군홧발에 무력하게 유린당할 때 유일하게 항거한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광주 그 이후, 시대의 범죄자처럼 숨죽이고 살아야 했습니다. 시민이 시민의식을 발휘하고도 그 흔적을 침묵 속으로 묻어야하는 비극적 아이러니. 연약하고 취약한 한국 시민사회는 1987년 6월 민주 항쟁을 거치며 겨우 싹을 틔웁니다.

광주 ‘5·18 민주화운동’ 10일 동안 165명이 숨졌습니다. 평균 나이 27세. 그 가운데엔 대학생 13명 고교생 11명 중학생 6명 초등생 2명이 포함됩니다. 행방불명자는 65명, 부상 후 완치가 안돼 병들어 숨진 사망자는 376명. 25년이 지난 2005년. 5·18 유가족 대표단체들이 합동으로 첫 공식 집계한 통계를 발표합니다. 이에 의하면 5·18 관련 사망자는 606명(중상으로 인한 후유증 사망자 포함)으로 나타납니다. 계엄군 사망자는 23명. 이중 14명은 공수부대와 향토사단 간의 오인사격으로 사망했습니다. 5·18 관련 시민 1394명이 구속 연행되고 427명 기소, 7명이 사형, 12명이 무기형을 받았습니다.

석 달 후 장충 체육관에서 희한한 대통령선거가 치러졌고, 전두환은 99.9%의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보도됩니다.

7. 우리를 잊지 말아주세요

대구 출신 감독이 만든 <화려한 휴가>의 엔딩 씬은 외부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당한 도청 사수 시민군들이 무전기로 서로를 위로해가며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키다 죽어가는 모습을 절절하게 그립니다. 시민군-계엄군 양측간 무력 공방은 일방적으로 끝납니다. 도청 잔류 시민군들은 죽어가면서도 누군가와의 소통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들에게 달려가지 못했습니다. 쓰러진 주검의 손안엔 무전기가 외롭게 쥐여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외로웠을 것입니다. 지금 살아있는 우리들은 죽음에 직면한 그들의 그 외로움에 대해 무언가 미안해해야 하지 않을까. ‘피의 살육작전’ 최고위급 명령권자는 “29만원”을 움켜쥐고 연희동에 건재합니다. 광주를 희생양 삼아 갓 피어난 민주주의를 공포로 바짝 압살했던 그들의 발포명령 하달과정 규명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있습니다.

여자 주인공 이요원(간호사 박신애 역할)은 심야 시내 가두방송에 나섭니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광주 시내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시민 여러분···.”

감동이 물결치는 영화가 아닙니다. 참으로 끔찍한 영화입니다.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영화는 그 날 광주로 가는 첫 계단에 불과합니다. 5·18 민주화운동이 발생한지 32년이 지나고 있습니다. 32년 전 5·18이 우리들 모두에게 남긴 화두는 민주 – 인권 – 희생입니다. 오늘 누리는 일상의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 광주는 가르쳐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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