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길의 시네마 올레길] ‘이끼’가 놓친 실존적 고민
타이틀 ? 이끼
감독 ? 강우석
주연 ? 정재영 박해일 유준상
개봉 ? 2010년
강우석 감독의 영화 <이끼>는 흥행문법과 대중성에 충실한 <투캅스> <공공의적> <실미도> 등 일련의 상업적 히트작들의 연장선상에 위치합니다. <이끼>의 원작은 인터넷에서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웹툰 <이끼>입니다. 만화작가 윤태호의 <이끼>는 80회 최종회까지 3700만 클릭을 기록할 정도로 온라인 세상을 달궜던 작품. 사회로부터 유폐된 특정 마을의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가는 긴장감이 음산한 기운과 잘 버물려진 만화는 네티즌의 인기를 한순간에 독차지하였습니다. 선과 악 경계에서 마을 사람들과 이방인 유해국의 극적 대치구조가 탁월한 만화적 형상화로 구축되었습니다. 절제된 대사와 지문, 줌인 줌아웃을 적절하게 구사한 웹툰의 전개방식은 3차원적 동영상을 보는듯한 입체감을 뚝뚝 흐르게 했습니다. 한국 만화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렸다는 평가가 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러닝타임 2시간40분 영화 <이끼>가 못다 이룬 점이 곳곳에서 눈에 띕니다. 스릴러 장르의 내공이 유달리 약한 한국 영화계에서 <이끼>가 이룬 성취를 격려하면서 몇가지 아쉬운 점을 지적해봅니다.
탐욕의 정교한 바벨탑이 안 보인다
기본적으로 <이끼>는 파헤치려는 자와 비밀을 덮으려는 자의 대결구조로 이뤄집니다. 천용덕(정재영)은 아버지 유목형(허준호)의 사인을 밝히려는 유해국(박해일)에게 “지나온 사실들을 니가 감당이나 할 수 있겠나. 말해주면 조용히 떠날래?”하면서 윽박지릅니다. 영화의 핵심 대립구조는 한없는 탐욕의 화신 천용덕과 인간구원에 몰두하는 구도자 유목형의 기이한 결합과 갈등에서 파생됩니다. 새로운 공동체 건설을 꿈꾸며, 이들이 공모한 17년 전 수도원 집단살해사건. 현장의 잔인함에 걸맞은 무게감과 인과관계가 명쾌하게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천용덕-유목형의 결의가 파워를 갖지 못합니다. 둘이서 도모한 명분이 갈등으로 치닫고 변질되는 과정에 관객들은 쉽게 몰입하지 못합니다.
20년간 ‘순사질’만 해왔다는 전직 형사 천용덕이 첩첩산중 마을 건설을 통해 과연 얼마나 높은 ‘부의 바벨탑’을 쌓았을까. 마을 위로 고속도로 하나 지나가며 나온 보상금이 얼마나 거금이었을까, 10가구도 안되는 산골마을 부동산 전답을 몰수하다시피 독차지했더라도 얼마나 삐까번쩍한 왕국이 될까. 읍내 상점 몇 개에 쏠쏠한 농협예금 계좌를 갖고 있고, 지역 국회의원 검찰지청 부장검사에게까지 연이 닿아있다고 큰 소리 치지만 천용덕이 꿈꾼 거대 바벨탑은 쉽게 실감나지 않습니다. 그것도 기껏 퇴물인간 세 명을 수족으로 부리면서 꿈꿨던 시골 ‘조폭왕국’은 거대 음모가 똬리 튼 스릴러물의 정교한 성채로서는 빈약하고 허약해보입니다.
재구성-재배치의 리모델링이 없다
원작 만화의 프레임에서 더 이상의 진전이 없습니다. 상상력의 여지가 많은 만화적 프레임과 개연성과 설득력을 중시하는 영화적 프레임은 분명 다릅니다. 캐릭터의 날카로운 선이 핵심인 만화와 짜임새와 완결성을 갖춰야할 영화 시나리오는 귀결점이 달라야 합니다. 원작을 뛰어넘는 재구성-재배치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이끼>는 원작 만화를 그대로 따라가는데 급급합니다. 원작은 첫 단추로만 활용하고 입체적으로 레이아웃을 다시 했어야 했습니다.
상영 시간 내내 유폐된 마을의 비밀이 양파처럼 한 꺼풀씩 벗겨질 것을 기대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용수철처럼 튕겨져 나오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공동체의 한 축이었던 유목형은 천용덕을 향해 칼 한번 휘둘렀다가 뺨 맞고 ‘뒷방 늙은이’로 전락해버립니다. 이때부터 영화의 긴장도는 심히 흔들립니다. 의절했던 아들 유해국이 나타나 현장에 뛰어들었지만 해국의 객기와 의분이 부친이 죽은 이유를 파헤치자는 것인지, 범죄로 쌓아올린 천용덕 왕국에 도전하겠다는 것인지 애매모호해집니다.
이방인 유해국에 대한 전석만(김상호) 하성규(김준배)의 막무가내 증오심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자신들의 오랜 세월 축적해온 기득권이 구체적으로 어느만큼 파괴될 것인지가 암시되지 않아 그들의 분노와 살기는 뜬금없어 보입니다. 처음 공동체 건설 초기 유목형에 감화 받아 인간구원에 흠뻑 빠졌다가 미끼를 던지는 천용덕 편에 가담하게 되는 필연성이 묘사되었다면 영화의 설득력은 증폭되었을 것입니다. (고작 고기 몇 조각이나 배설욕구 해결은 쓴 웃음만 유도할 뿐)
즉 감독은 누군가의 내레이션을 통해서건 대사를 통해서건 압축된 인과관계의 근거를 탄탄하게 배치했어야 했습니다. 원작을 못 본 관객은 감독이 떠맡아야 할 궁금증에 시달리다 영화 중간 중간 자리를 뒤척여야만 합니다. 마을 공동체를 이루는 각 캐릭터들이 구성원으로서 자리 잡기까지의 과정을 시간상 전부 보여주지 못할 지라도 필연성의 징검다리를 배치해둬야 하는데 과거제시가 미약합니다.
긴장감을 응축한 최후의 폭발력이 없다
신을 앙모하는 인간과 물신에 빠진 인간의 대결축이 일찌감치 무너진 것이 본질적 흠결이 되고 맙니다. 그 아들이 대신 그 축을 물려받지만 절대악으로 치달아야 할 천용덕은 인간적 면모를 과시하며 마을 촌장으로서 오히려 신축성을 발휘합니다. 선과 악의 이분법적 구도를 퓨전하는 것이 애초 의도였다면 삶의 애매모호함을 강조해 강한 실존의 메타포를 구사했어야 했는데 이도저도 아닌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국 조폭영화의 클리셰가 되버린 연장 들고 추격하는 장면은 더 이상 밀도 깊은 긴장감 유발 장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올드보이> <추격자>의 망치 액션으로도 이젠 충분합니다. 시속 100km 미드 속도감에 길들여진 한국 관객들은 헐거운 시속 40km ‘인간본성 폭로극’에 기대치를 낮추고 맙니다. 각색팀이 사전에 치밀하게 검토한 내공 깃든 탄탄한 스토리텔링은 맛보지 못하고 직업 배우들의 연기력에만 의존하는 형국. “조연까지 다들 연기는 참 잘 한다”는 후렴은 <이끼> 강 감독에겐 결코 칭송이 될 수 없습니다. 영화가 끝난 후 울림이 없어 유감입니다. 자디잔 테크닉으로 긴장감을 이어붙인 기법엔 칭찬을 보내지만 남는 것이 별로 없는 허탈감은 어쩔 수 없군요. 뭔가 생각할 여지를 주는 지적 정교함까진 설계되지 못했습니다.
원작과 다른 결말. 달려드는 사내들을 다 받아 주면서 결국 그들을 이용했던 이영지(유선)의 허허실실도 생뚱맞습니다. 가녀린 선을 가진 영지는 이편과 저편 사이에서 불안해 하다가 갑자기 최후의 결승주자로 등극합니다. 유목형과 천용덕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영지의 내적 갈등은 표피적입니다. 막판 대반전 주인공 자격을 획득할 만큼 으슥한 복선이 영화 전편에 흐르지 않습니다. 마을의 가장 낮은 곳. 정문 초소 같았던 ‘점빵’의 위치에서 가장 높은 파놉티콘(Panopticon)성채로 등극한 영지의 흐릿한 미소가 모든 메시지를 대변해줄 지….
스릴러의 긴장감을 헤치는 뜬금없는 상투적 유머, 충무로 터줏대감들의 탄탄한 연기력, 한국사회에 폭넓게 스며든 물신주의에 대한 주제의식, 하지만 정교하지 못한 시나리오로 믹스된 훌륭한 서스펜스 대중 흥행물. 웹툰 원작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질 못했습니다. 딱 거기까지입니다. 평범함에 지친 한국 관객의 뒤통수를 후려칠 지적 폭발력은 아직 더 기다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