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길의 시네마 올레길] 미완성된 내 사랑을 위하여


엘 시크레토: 비밀의 눈동자
(El Secreto De Sus Ojos, The Secret In Their Eyes)
감독 – 후안 호세 캄파넬라
출연 – 리카도 다린(벤야민 에스포지토)
??????? 솔레다드 빌라밀(이레네 헤이스팅스)
제작국 – 아르헨티나, 스페인
개봉 – 2010.11.


# 25년 전 사건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앙역. 한 남녀가 이별을 합니다. 남자는 기차 객실에서 차창 밖의 여자를 애처롭게 응시하고 여자는 떠나는 기차를 따라가며 차창에 손을 붙여 그의 손바닥과 교감합니다. 서로를 붙잡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이별에 두 마음만 포개고 있습니다.

벤야민 에스포지토는 검찰 수사관입니다. 그에게 초임 여검사 이레네 헤이스팅스가 나타납니다.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명문가의 딸입니다. 벤야민은 자신의 상사에게 한눈에 반합니다. 고졸 출신 하급 공무원 신분에 이레네는 감히 넘보기 어려운 존재입니다. 신임 검사 이레네 팀에겐 또 한명의 유능한 수사관 파블로 산도발이 있습니다. 나이 지긋한 파블로는 벤야민과 짝을 이루며 사건의 핵심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요원입니다.

이들에게 끔찍한 강간살인사건이 맡겨집니다. 희생자는 이제 막 결혼한 신부. 살인자는 남편이 출근한 뒤에 신혼집을 덮쳐, 젊고 아름다운 여교사를 해칩니다. 여인은 피투성이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현장에 도착한 벤야민은 망연자실합니다. 신혼부부의 사랑이 넘쳤던 공간이 피범벅의 아수라장으로?변해있습니다. 벤야민은 신부의 남편 모랄레스에게 사고 소식를 전합니다. 범인에 관한 확실한 단서가 발견되지 않습니다. 근거도 없이 외국인 근로자 두 명을 범인으로 지목하는 경찰수사는 엉뚱하고 성의가 없습니다. 미제사건으로 방치될 조짐입니다.


# 사라진 정의

벤야민은 모랄레스의 집에서 신부 릴리아니의 사진첩을 면밀히 살펴봅니다. 학창시절 단체사진 속의 신부를 유난히 응시하는 한 청소년이 눈에 뜨입니다. 여러 장의 사진 속에서 남자는 릴리아니만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 이름은 고메스. 바로 진범입니다. 어린 시절 짝사랑한 릴리아니를 변태적 행위의 대상으로 삼은 것입니다. 벤야민과 파블로는 고메스 찾기에 나서지만 오리무중입니다. 모랄레스도 살인범을 찾기 위해 그의 예상 동선을 훑다가 기차역 대합실에서 무작정 대기합니다. 벤야민과 파블로는 고메스 고향집에서 발견된 고메스 편지뭉치에서 단서를 발견합니다. 바로 고메스가 프로축구팀 ‘라싱’의 열혈 팬임을 간파합니다.

파블로는 자신의 직관에 의하면 남자는 여자, 종교, 가족까지 바꿀 수 있지만 단 하나 제 속의 열정(Passion)만은 바꿀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라싱팀이 경기를 벌이는 축구장을 찾은 두 사람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심정으로 고메스를 찾아 헤맵니다. 우여곡절 끝에 고메스를 발견, 체포합니다. 범행 자체를 부인하는 고메스. 하지만 그의 성적 콤플렉스를 건드리는 이레네의 기지로 스스로 자백하고 맙니다.

시간이 흐릅니다. 아내를 잃은 모랄레스의 한이 조금이나마 풀리나 싶었는데 사건은 의외로 뒤집어집니다. 종신형에 처해져야할 고메스가 대통령 경호요원이 되어 TV화면에 당당히 등장합니다. 옥중에서 반정부 게릴라 소탕작전에 앞장선 공로(?)로 석방된 것입니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공권력은 총체적으로 부패, 사회정의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좌익을 척결한다는 명분으로 1976년 군부쿠데타가 발생합니다. 집권 군부 우두머리 몇몇이 교대로 대통령 권좌에 앉습니다. 한때 남미에서 가장 높은 경제력을 과시했던 세계 5대 자원부국 아르헨티나는 정치부패, 경제파탄으로 거덜 나고 맙니다. 고급식당 음식값이 식사 중에 바뀌는 초인플레의 나락에 빠집니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홀대하는 군부통치가 1983년까지 이어집니다. 정치적 목소리를 낸 사람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실종사건’이 횡행합니다. 영화는 이런 암울한 상황을 배경 삼아 전개됩니다.

고메스는 이레네 팀 앞에 나타나 대통령의 경호원으로서 위세를 부리며 보복을 암시합니다. 어느 날 백색테러 조직원들을 보내 벤야민을 죽이려다 파블로가 대신 살해당합니다. 정의가 전복된 상황에서 벤야민은 이레네가 소개한 은신처로 도피하게 됩니다.


# 당신의 이의제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2010년 82회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받은 아르헨티나 영화 <엘 시크레토: 비밀의 눈동자>는 두 개의 이야기가 뼈대를 이루며 25년 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교차 편집됩니다. 스페인어 ‘엘 시크레토’는 비밀이란 뜻입니다. 스토리라인의 외관은 살인범을 쫓는 스릴러 형식이지만 그 안에는 벤야민과 이레네의 유장한 사랑이 흐릅니다.

여성 상사와 멋진 중년 부하. 두 사람은 함께 일을 하면서 서로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먼저 다가가 선뜻 마음을 열어 보이지 못합니다. 여자는 남자가 먼저 문을 노크해주길 기다렸고 남자는 감히 넘보지 못할 위치에 있는 여자를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약혼설이 나도는 명문가의 딸 이레네. 현재 그녀는 집안의 압력으로 딴 남자와 약혼해야만 하는 처지입니다.

어느 날 이레네는 벤야민을 마주 보고 당당히 말합니다.

“벤야민, 왜 바라만 보고 있죠. 왜 내 인생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요? 나의 약혼에 대해서··· 나는 당신의 이의제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당신··· 바보! ”

애모하는 두 사람은 서로를 갈망하면서도 현실을 돌파하지 못하고 한사람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도피하고 한 사람은 원치 않는 결혼의 문으로 들어섭니다.


# 사랑과 복수의 이중주

길고 긴 25년간의 이별. 요즘 벤야민은 자신의 삶을 소설로 쓰기 위해 과거를 되돌아보고 있습니다. 25년 전 발생한 살인강간 사건은 벤야민의 인생행로를 바꿔놓았습니다. 살인범 고메스의 실종으로 마무리된 사건의 결말이 뭔가 석연치 않습니다. 현직 법원 고위간부인 이레네가 뭔가 실마리를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레네 앞에 초로의 남자 벤야민이 나타납니다. 두 사람은 반갑게 해후합니다. “모랄레스 사건을 글로 쓰고 싶어요. 왠지 몰라도 이 사건이 잊히지 않아요.” “제일 기억에 남는 곳에서부터 시작을 해봐요. 가장 자주 기억나는 게 뭐죠” 두 사람의 눈길이 촉촉이 젖어있습니다.

영화의 결말은 충격적입니다. 사라진 고메스는 어디로 갔을까. 신혼의 가정을 파괴한 흉악범. 그런 범인을 현실의 법은 용인하고 활개치도록 묵과합니다. 젊은 은행원 모랄레스는 아내의 원수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보복을 합니다. 언젠가 모랄레스는 벤야민에게 말했습니다.

모랄레스 “범인이 잡히면 몇 년 형을 받죠?”
벤야민 “강간 살인이니 종신형일 겁니다. 사형제도가? 없으니까요”
모랄레스 “저도 사형은 반대입니다”
벤야민 “당신의 입장에서는 사형을 시켜야 복수가 되는 것 아닌가요”
모랄레스 “복수 말입니까? 놈을 강간하고 때려죽이진 않잖아요. 주사 한방으로 낮잠 재우듯 죽이는 것은 불공평해요. 편하게 보낼 순 없죠. 놈을 늙게 둬야 해요. 가치 없는 인생을 살도록···.”

복수를 꿈꿔본 적이 있나요. 정의감 있는 법의 심판이 작동되지 않을 때 사랑을 훼손당한 피해자가 자신의 전 인생을 담보한 채 감행하는 처벌의 방식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모랄레스는 아내의 죽음 이후 자신의 정상적인 삶에 정지버튼을 누릅니다. 여생을 고메스 단죄에 집중합니다.

못다 이룬 사랑 때문에 항상 마음이 뒤채이나요. 남자의 사랑은 의외로 소심합니다. 남자의 마음은 의외로 비겁합니다. 대신 여자는 기다려줍니다. 결국 사랑의 완성은 여자의 몫입니다. 여자보다 먼저 표현하고 약속을 건네는 것이 남자의 의무라고 영화는 주장합니다. 사랑과 복수의 이중주. 미완성된 사랑을 가슴에 품고 있는 분들에게 강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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