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길의 시네마 올레길] 가슴에 박힌 추억의 화인(火印)

 

아시아엔은 오는 11월11일 창간 3돌을 맞습니다. 그동안 독자들께서 보내주신 성원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시아엔은 창간 1년만에 네이버와 검색제휴를 맺었습니다. 하지만 제휴 이전 기사는 검색되지 않고 있어, 그 이전 발행된 아시아엔 콘텐츠 가운데 일부를 다시 내기로 했습니다. 독자 여러분께 좋은 정보가 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편집자>

영화 타이틀 – 비포 선셋 (Before Sunset)
감독 – 리처드 링클레이터
주연 – 에단 호크, 줄리 델피
제작년도 – 2004년?

너를 만나고 싶어 소설을 썼다

화들짝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처럼 짧았지만 열정으로 가득 찼던 비엔나의 밤.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느(줄리 델피)는 뜨거웠던 추억을 어떻게 삭히며 살아가고 있을까.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전작 <비포 선라이즈>에 이어 속편 <비포 선셋>을 9년 만에 내놓는다. 속편 시나리오는 젊은 감독과 남녀 두 주인공이 머리를 맞대고 공동 작업한 결과다.

20대에 비엔나역에서 헤어진 두 사람은 9년 만에 파리의 한 서점에서 재회한다. 제시는 청춘 남녀의 아스라한 하룻밤 비엔나스토리를 소설로 만들어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단한다. 어쩌면 연락처 하나 주고받지 못하고 헤어진 셀린느를 만나고 싶어 소설을 썼는지도 모른다.

제시는 파리 셰익스피어 서점 ‘저자와의 대화’시간에 초청받는다. 이 곳에서 꿈에 그리던 셀린느를 조우한다.

미국인 유부남 제시는 현재 아내와 소원하다 못해 썰렁하게 살고 있다. 하지만 네 살짜리 아들은 끔찍이 사랑하고 있다. 국제환경단체에서 환경운동가로서 일하고 있는 셀린느는 제대로 풀리지 않는 사랑의 행로 곳곳에서 상처받았던 30대 여인으로 변해있다. “마음에 든 사내들은 하나같이 다 떠나갔다”고 푸념한다. 지금은 (늘 집을 비우는) 종군 사진기자와 같이 살고 있다.

미국으로 돌아가는 제시가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80분가량 짧은 만남이 두 사람에게 주어진다. 그리웠던 둘은 파리의 카페 골목과 공원을 걸으며 대화를 나눈다. 카메라는 러닝타임 80분간을 리얼타임으로 생중계하며 두 연인들을 따라 다닌다. 전편에 이어 인위적인 편집은 극도로 자제했고 음향으로 완급을 조절하지도 않았다. 명쾌하고 담백한 대화의 힘으로 영화는 탄력 받는다.

세느강 바람에 나부끼는 두 마음

두 사람은 세느강 유람선에 올랐다. 바로 곁으로 웅장한 노틀담 사원이 스친다.

제시 = 내가 우리 이야길 책으로 쓴 건 그 날의 모든 것을 잊기 싫어서였어. 그 만남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오래 동안 기억하고 싶었어.

셀린느 = 그 말을 들으니 기뻐. 나도 잊을 수가 없었어. 요즘은 다들 쉽게 사랑하고 쉽게 끝내잖아. 옷 바꿔 입듯 상대를 바꾸지. 난 아무 것도 쉽게 잊은 적 없어. 누구나 저마다의 특별함이 있지. 헤어진 빈자리는 결코 딴 사람이 채워주지 못하지. 헤어질 때마다 큰 상처를 받아. 그래서 누굴 사귀기가 힘들어. 하룻밤 인연도 안 만들어. 별게 다 생각나 괴롭거든. 난 어릴 적 늘 학교에 지각을 했어. 등교할 때 엄마가 내 뒤를 밟아 봤더니 나무에서 떨어진 밤톨 들여다보고 개미, 낙엽 따윌 구경하고 있더래. 사람을 만나도 난 그런 사소하고 작은 일에 감동받아. 누구나 저마다의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지. 그 시절 너의 붉은 수염도 기억나. 헤어지기 전 그 새벽 햇살에 빛나던 그 모습, 그리웠어.

제시 = 책을 쓴 이유가 확실해졌어. ‘저자와의 만남’시간에 너가 찾아오면 꽉 잡으려고.

셀린느 = 내가 올 걸 알았어?

제시 = 책을 쓴 건 널 찾으려는 뜻도 있었어.

셀린느 = 거짓말이라도 듣기는 좋네.

제시 = 책을 안 썼으면 어떻게 다시 만났겠어.

셀린느 = 하지만 지금 우린 너의 책 속 캐릭터일 뿐이야.

제시 = 오! 하나님, 대체 비엔나엔 왜 안 온 거야. 네가 왔으면 모든 게 변했을 텐데.

(갑자기 제시의 표정이 너무나 안타깝게 변한다)

셀린느 = 그때 안 만난 게 다행일지도 몰라.

제시 = 서로 원수가 됐을까봐? 왜 그때 연락처를 교환 안했을까.

셀린느 = 젊고 어리석었으니까.

제시 = 지금도 그럴까.

셀린느 = 젊은 땐 사랑의 기회가 얼마든지 올 것 같지만 사실 그런 기회는 많지 않잖아.

제시 = 올 때 꽉 잡아야 돼.

셀린느 = 과거는 잊는 게 순리야.

제시 = 너의 할머니가 더 늦게 돌아가셨거나 일찍 돌아가셨다면 상황은 달라졌어.

셀린느 = 다 끝난 일이야.

(쌀쌀한 목소리가 두드러진다)

전작 ‘비포 선라이즈’ 마지막 장면. 6개월 뒤 비엔나역에서 다시 만나기로 한 두 사람. 제시는 부푼 가슴으로 미국에서 찾아왔지만 셀린느는 부다페스트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비엔나를 찾아가지 못한다.

제시 = 알아. 하지만··· 왠지 뭔가 억울한 느낌이 들어. 결혼 날짜를 잡고도 너 생각만 했어. 결혼식장으로 가는 차안에서 창밖을 내다보다 갑자기 너의 모습이 보였어. 우산을 접으며 빵집으로 들어가고 있었어. 뉴욕 브로드웨이 13번가. 지금 생각하니 네가?맞았어.

셀린느 = 미국 유학시절 그때 11번가에 살고 있을 때였구나.

제시 = 아, 보라구. 아내는 대학교 때 만났어. 유능한 교사에 훌륭한 엄마지. 예쁘고 똑똑해. 당시 난 생각했어. 훌륭한 남자들은 모두 남에게 헌신하며 사는 것 같았어. 뭐랄까, 자아를 완성시키고 싶었어. 정직한 본능을 포기하고서라도 말이야, 이해가 돼? 결혼 상대가 누군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어. 완벽한 짝은 없잖아. 중요한 것은 책임지는 것이야.


세느강 바람이 시원합니다. 셀린느 금발이 나부낍니다.

제시 = 지금의 아내와는 좀 서먹해. 나는 수도승처럼 살아. 네 살짜리 아들하고 있을 때만 행복해. 상담도 해보고 온갖 짓을 다해봤어. 헤어지고 싶지만 아들 땜에 모든 것을 참기로 했어. 우리 부부는 의무감 때문에 살고 있어. 하긴 다시 생각해보면 사랑이란 것을 진작 포기했어야 했어. 네가 6개월 뒤 비엔나에서 날 바람 맞춘 그 날부터 포기했어야 됐어.

셀린느 = (울먹거리며) 그런 이야길 왜 해? 마음이 안 좋아. 너의 결혼 생활이 좋지 않다니. 정신과 의사 내 친구가 결별위기의 커플들을 상담했는데 결별이유가 바로 열정이 식는 것을 못 참는 거래. 하지만 열정이 식는 것은 당연하잖아. 우리가 계속 만나서 쭉 사랑만 한다면 딴 일은 언제 했겠어.

“그 날,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어서 이젠 남은 게 없어”

시간을 늦춰가며 이야기를 하다가 제시는 공항으로 가기보다 셀린느를 먼저 바래다줍니다.

셀린느 = 이제 사랑에 연연 안 해. 상처를 받기 싫거든. 그보다는 딴 것들에 관심을 쏟으며 삶의 희망을 찾고 있어. 애인과 늘 붙어사는 것도 싫어. 혼자 사는 것 외롭지만 홀가분해. 늘 붙어살면 질식할 걸···.

제시 = 아깐 남자가 필요하다며?

셀린느 = 옆에 붙어있으면 숨 막혀. 좀 웃기지? 혼자 있을 때 행복해. 함께 있으면서 고독한 것보다 나아. 사랑은 힘들어. 몇 번 상처받으면서 환상이 깨졌어. 어쩌면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본 적이 없는지도 몰라. 좋은 남자들이었지만 진정한 교감은 없었어. (셀린느 표정이 점차 흥분된다) 너의 책을 읽고 혼란이 생겼어. 전에 내가 얼마나 낭만과 꿈이 많았는지 깨달았거든. 그런데 지금 난 사랑을 못 믿게 됐어. (화가 난 듯) 그날 밤, 모든 것을 쏟아 부어서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 네가 모든 것을 다 가져가 버린 것 같아. 내 심장은 식어버렸어. (셀린느 목소리는 비장해진다) 현실과 사랑이 공존하지 못하고 있어. 사귄 녀석들은 다 결혼했어. 나랑 쫑나면 다들 결혼 하더라고. 그리곤 전화해선 내게 고맙대. 진정한 사랑을 가르쳐줘서···. (셀린느는 울먹거리며 열변을 토하고 제시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나쁜 새끼들. 왜 내겐 청혼을 안 해? 물론 거절했겠지만. 하긴 다 내 탓이지. 인연을 느낀 남자도 없었어. 인연이란 게 뭐야. 그런 게 어디 있나! 짝을 못 만나면 반쪽짜리 삶이야? 상처받는 데 이젠 지쳤어. 여자로서 난 실패했어. 초연한 척 하지만 속으로 죽어가고 있다구. 감각 없는 무생물처럼 변하고 있단 말이야.

가끔 갈색 상자를 살짝 꺼내 봅니다

사랑은 대화이며 교감이다. 교감의 다양한 변주곡이 예술이며 문학이다. 현실은 언제나 비루하다. 거기에 물질로 인해 다툼이 일어나면 삶은 처참해진다. 사랑의 환상은 生의 환멸로 서서히 이어진다. 변해가는 순리를 아무도 거스르지 못한다. 젊음이 넘치던 꿈은 어느덧 추억의 딱딱한 꾸러미로 변해 시렁 위에 올려진다.

당신과 당신의 연인간의 소통이 수돗물처럼 늘 콸콸 쏟아진다면 과연 인생이 어땠을까. 삶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30대에 옛 연인으로 재회한 제시와 셀린느의 여로가 말을 해준다. 팽팽하던 젊음은 주름지고 그 얼굴엔 세월의 그늘이 서서히 깃들고 있다. 전편에 이어 ‘대화의 미학’은 여전히 살아있다.

현실을 인정하면서 현실을 경쾌하게 조롱하는 농담과 투정이 정겹다. 두 사람에게선 언뜻 삶의 연륜도 묻어난다. 9년 전 그 뜨거운 사랑의 화인(火印)으로부터 아직 자유롭지 못한 제시와 셀린느. 두 사람을 하나로 묶어주는 마음의 사슬은 9년간의 단절을 금방 뛰어넘게 한다. ‘왜 다시 못 만났을까’라는 회한과 상실감의 몸짓이기도 하다. 재회한 두 사람은 사랑을 말하지 않고 자잘한 일상을 토로한다.

주고받는 대화의 코드가 척척 맞아 떨어지는 연인들의 기쁨을 아시는가. 쓰디쓴 말 한마디라도 그 맥락을 절절이 절감하는 두 사람. 사랑이 일상과 현실 속으로 내려앉아 서늘해질 때, 이제 옛 연인 제시와 셀린느는 결코 무리하지 않는다. 세상이 더 이상 낭만적이지 않다는 곡절을 알아챈 나이. 이마와 눈 아래의 주름살이 더 따뜻하게 다가온다.

누구나 가슴에 박힌 추억의 화인(火印)을 갖고 있다. <비포 선라이즈>가 초여름 밤하늘에 작렬하는 폭죽이라면 <비포 선셋>은 가을날의 갈색 에세이다. 나이 먹어 가면서 갈색 책꽂이 갈색 페이지를 살짝 들춰보는 은밀한 비밀. 들키고 싶지 않는 혼자만의 밀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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