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길의 시네마 올레길] 기억하지 못하는 사랑이란…

타이틀 : 어웨이 프롬 허 (Away From Her)
감독 : 사라 폴리
출연 : 줄리 크리스티,?고든 핀센트
원작 : 앨리스 먼로의 소설 ‘곰이 산을 오르다’
제작국가 : 캐나다
개봉 : 2008년

늙어감의 두려움이여, 삶의 어처구니없음이여

아내가 기억을 잃고 있습니다. 기억을 상실한 아내는 길을 잃고 홀로 헤맵니다. 전직 대학교수 그랜트. 아름다운 아내 피오나와 44년간 동고동락했습니다. 얼마 전부터 피오나는 설거지 끝낸 그릇을 냉동실에 넣기도 합니다. 산책 나섰다가 길을 잃어?귀가하지도 못합니다. 식사 중 와인을 따르려다 ‘와인’ 발음을 못해 ‘위인’이라 읊조리다 망연자실합니다.

청춘 시절, 피오나는 참 발랄하고 낭만적인 소녀였습니다. “그랜트, 생각해봐요. 우리 둘이 결혼해서 살면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요?” 이렇게 먼저 청혼한 피오나였습니다. 그런 피오나가 치매에 시달리기 시작합니다. 무탈하게 한 생애를 겪어낸 노부부에게 배우자 한사람의 알츠하이머 질병은 두 사람의 삶을 전혀 다른 국면으로 끌고 갑니다.

피오나가 앞장서서 요양원 문을 열고 성큼 들어갑니다. 피오나는 남편에게 “받아들일 것은 차분히 받아들이자”고 말합니다. 피오나는 치매환자 가족이나 간병인의 고통을 미리 헤아리는 듯합니다. 남편에게 간병의 힘겹고 긴 과정을 맡기고 싶지 않은 모양. 그녀의 결단은 단호합니다.

요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피오나는 그랜트에게 말합니다. “기억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 같아. 과연 세상이 사라져 버린 것일까. 고마워. 나랑 살아줘서. 그때 젊은 제자가 죽을 줄 몰랐어….”

아, 단기 기억은 사라지지만 상처받은 장기 기억은 남아있는 것일까요. 수십 년 전 그랜트 교수는 여제자 베로니카와 바람을 피웠습니다. 그렇지만 그랜트는 피오나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젊은 제자 베로니카는 자살하고 맙니다. 치매증상이 있는 아내가 요양원에 입원하러 가는 날, 이 오래된 상처를 되새기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44년간 함께 살았는데

그랜트의 가슴은 쓰라립니다. 피오나를 요양원에 보내지 않고 여생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입원한 후 한 달간은 모든 면회가 금지됩니다. 44년간 함께 붙어있던 그랜트에게 한 달은 너무 낯선 기간이었습니다. 첫 면회가 허용된 날. 수선화 한 다발을 들고 찾아온 그랜트는 깜짝 놀랍니다. 한 달 만에 피오나는 딴 사람으로 변해있습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바짝 붙어 있습니다. 훨씬 병약한 외간 남자 오브리의 간병인으로 자처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피오나는 오브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챙겨줍니다. 화들짝 놀란 그랜트에게 오브리를 어린 시절 동네 남자친구라고 천연덕스럽게 거짓(?)소개까지 합니다. 그녀는 매일 면회를 오는 남편 그랜트를 점점 어색해합니다. 이젠 부부 사이에 인사하는 것도 낯설어하는 피오나. 그녀는 휠체어에 태운 오브리를 남편처럼 대하며 다정하게 산책까지 갔다 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요. 피오나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랜트에게?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참 끈질기게 찾아오는군요.”

그랜트는 허무합니다. 딴 사람으로 변해버린 아내 피오나. 44년간의 부부시절 조차 망각해버린 아내를 처연하게 쳐다봅니다. 담당 간호사에게 쓰라린 심정을 토로합니다. “기억이 사라지면 소중한 과거조차 사라지는 걸까요. 이렇게 되고나니 너무 허무합니다. 마치 나와 피오나 사이에 과연 44년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한순간 이런 생각도 들어요. 지금 피오나가 내게 벌을 주고 있나 하는 생각도….”

간호사는 담담히 대답합니다. “남편의 생각과 아내의 생각이 너무 다른 경우를 종종 봅니다. 남편은 그동안 별 일 없이 잘 지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누군가 꾸준히 참아내며 지탱한 덕분이죠. 피오나의 생각은 다를 수 있는 거죠.”

그랜트는 오브리의 아내를 찾아갑니다. 두 사람은 피오나와 오브리의 현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오브리의 아내 마리안에게 부탁합니다. “당신 남편 오브리를 요양원에서 데려가 주세요.”

피오나와 오브리는 서로 헤어지는 것을 알고 너무 슬퍼합니다. 오브리가 요양원을 떠나가자 피오나는 두문불출 거동도 하지 않고 병색이 완연해집니다. 병실에 쓰러져 오브리가 그려준 자신의 초상화를 벽에 붙이고 하루 종일 쳐다보고 있습니다. 요양원측은 피오나 상태가 악화되면 걷잡을 수 없다면서 심각하게 우려합니다.

사랑에서 기억이 빠져나가버리면…

남편은 또다시 결단을 내립니다. 다시 오브리를 데려와 아내 피오나에게 ‘깜짝 선물’로 등장시키려 합니다. 이제 아내에게 또 다른 여생을 누리도록 도와주는 것이 자신의 할 일이라 여깁니다. 아내가 원하는 것을 남편이란 이름으로 방해하지 않고 바라보기로 합니다. 가만히 지켜봐주는 옛 남편으로 남으려 합니다. 영화는 말미에 기대치 않았던 반전을 보여줍니다.

피오나는 거짓 연기를 한 것일까요. 치매란 중병은 생각보다 처절합니다. 몸 마음 기억 추억 감성 이성 아픔 그리움…. 이중에서 기억이란 고리가 빠져나가 버리면 우리의 인생이 온전할까요. 과거와 추억이 무너져 내립니다. 삶의 기반인 관계가 손안의 모래처럼 빠져나가 버립니다.

사랑으로 쌓아왔던 두 사람 사이에 예기치 않은 망각의 江이 흐릅니다. 전혀 생소한 남남처럼 타인으로 변해버립니다. 늙음은 피할 수 없이 누구에게나 다가옵니다. 한 길을 가려는 두 사람에게 다가오는 것은 행복이 많을까요. 불행이 더 많을까요. 노년의 사랑을 간직하려면 이 영화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어웨이 프롬 허’는 사랑한다는 것과 늙어간다는 것이 겹쳐질 때 치매증세가 개입한 부부의 모습을 그린 캐나다 영화입니다. 피오나로 열연한 줄리 크리스티는 1965년 대히트작 ‘닥터 지바고’에서 주인공 라라 역으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렸습니다. 나이 들어 출연한 이 영화로 2008년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받고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릅니다. 캐나다 명배우이자 연출가인 고든 핀센트는 치매 걸린 아내를 바라보는 노신사 그랜트 역할을?생생하게 연기했습니다.

스크린을 가득 채운 광활한 캐나다 설원 풍경에 자작나무 숲 사이를 조용히 흐르는 주제 음악은 참으로 궁합이 맞습니다. 이 속 깊은 영화가 연기자 출신 서른 살 여성 감독의 데뷔작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그녀의 연출 내공에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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