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길의 시네마 올레길] 나의 ‘취향’과 당신의 ‘취향’이 만날 때

타이틀 : 타인의 취향 (Le Go?t des autres / The Taste of Others )
감독 :아녜스 자우이
주연 : 장 피에르 바크리 (카스텔라 역), 안느 알바로 (클라라 역)
제작국가 : 프랑스
개봉: 2001년

호프집에서 만나는 철학

“타인을 아는 것이 자신을 아는 것보다 쉬운가”
“예술은 현실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는가”
“괴로워하지 않고 욕망할 수 있는가”

갑자기 위 질문들에 답하라고 과제가 주어진다면 참 황당하고 힘겨울 것입니다. 최근 프랑스 바칼로레아(Baccalaureat,고등학교 졸업자격 시험) 철학 논술시험에 출제된 문제입니다. 바칼로레아는 대학입학 자격이 주어지는 프랑스 고교 졸업학위인 셈입니다. 프랑스 바칼로레아는 1808년 나폴레옹 집권 때 처음 선보인 이래?200년째 지속되고 있습니다.

바칼로레아 철학 시험이 있는 날이면 프랑스 지식인들에겐?’토론의 날’이 됩니다. 시험을 치르는 학생뿐만 아니라 평범한 일반인들도 시험문제의 답을 궁리해보며 끼리끼리 모여 토론회를 연다고 합니다. TV 방송은?유명인사들과 시민들이 참여한 공개 토론회를 중계합니다. 프랑스 전체가 일종의 논술 고사를 치르는 것입니다. 해마다 초여름에 바칼로레아 철학논술 시험이 치러집니다. 인문계 사회계 자연계 별로 3개의 주제가 주어지는 데 그중 하나를 선택해 4시간 안에 답안을 작성해야 합니다.

아래는 근자에 출제된 바칼로레아 실제 시험 문제들입니다.

* 행복은 단지 한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인가.
* 역사는 인간에게 오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에 의해 오는 것인가.
* 예술이 인간과 현실과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
* 인간은 기술로부터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 정의냐 부정의냐는 관습적으로 구별될 뿐인가.
* 자유롭다는 것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다는 것인가.

철학이 허울뿐인 상아탑의 시렁위에 고고하게 얹혀있는 것이 아니라 집안?거실에서, 호프집에서, 식당에서, 달리는 차안에서 발견되면 좋겠습니다. 철학은?난해한 담론이 아니라 상식과 취향의 다양성 문제이기에 늘 우리 곁에 있어야 합니다.

인문주의적 분위기에 취해보았는가

<타인의 취향>은 2001년 여름께 국내 개봉된 프랑스 로맨틱 코미디영화. 남자주인공 카스텔라는 잘나가는 중소기업 사장. 여자주인공 클라라는 가난한 연극배우이면서 파트타임으로 영어를 가르치는 인텔리. 카스텔라는 남편의 취향은 싹 무시하는 아내에게 짓눌려 삽니다. 전형적 중년남자로 무미건조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느 날 극장에서 지루한 연극 한 편을 보다가 눈이 번쩍 뜨입니다. 주연 배우 클라라의 연기에 흠뻑 빠지게 됩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자신에게 영어를 가르치기로 소개받은 개인 교사였습니다. 클라라는 카스텔라에게 피고용인 신분이지만 영어를 가르치는 내내 당당합니다. 카스텔라는 클라라에게 조금씩 빠져듭니다. 하지만 클라라는 저급한 취향의 카스텔라를 내심 못마땅해 합니다. 카스텔라는 클라라의 연극 친구들과 어울리다 지적인 농담을 소화하지 못해 웃음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클라라를 향한 가슴 떨리는 연정이 서서히 카스텔라를 변하게 합니다 ‘마누라’의 일방적인 아줌마 취향에 짓눌려 살다가 서서히 자신만의 취향을 찾아갑니다. 그의 표정은 눈에 띄게 밝아집니다. 클라라도 카스텔라의 솔직함과 정성에 감동해 슬며시?마음의 문을 열어갑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카스텔라의 속물근성을 비웃을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 안에도 똑같은 속물이 들어앉아 있기 때문입니다.?동시에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진지해져가는?카스텔라에게서 위안도 받습니다. 조금씩 변해가는 중년 남자의 취향이 정겹고 살갑게 다가옵니다.

지적인 숙성, 오래 묵힌 교양의 힘, 자신만의 취향이 프티 부르주아 재력의 힘과 물질적?우월함을 제압해가는 풍경이?경쾌하게 펼쳐집니다.?스크린엔 인문주의적 분위기가 물씬 배여 나옵니다.

타인의 취향을 수용해야 나의 취향이 자란다

영화는 사랑이라는 것이 ‘운명’이라는 단독 엔진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취향’이라는 수동 기어와 핸들링으로 선택되고 작동된다고 암시합니다. 그렇다면 연애한다는 것은?너와 나, 두 사람 간?취향의 선택과정이 아닐까.

영화는 상대방의 취향을 받아들이는 기술을 제대로 익히지 않으면 그 누구의 존중도 받지 못할 거라는 은유도 함께 드러냅니다. 나의 취향을 표현하거나 타인의 취향을 존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취향은 발견되는 것일까, 개발되는 것일까. 자신의 생각을 차분히 이야기하고 감성의 결을 다듬어가는 것이 자기 취향을 만들어 가는 핵심적인 과정입니다. 취향은 객관식 문제가 아니고?주관식 탐구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취향은 단순한 감각의 다양성이 아니고 문화적인 스타일입니다.

‘나의 취향’이란 스스로를?남 앞에서 표현할 줄 알고 내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입니다. 결국 나의 취향이란 나의 존재방식입니다. 나의 취향을 인정받고 관계의 만족감을 느끼려면 바로 타인의 취향과 교감했을 때 가능합니다. ‘타인의 취향’을 수용하여야 나의 취향이 자라고 성숙해집니다. 오늘도 당신의 취향이 멋진‘타인의 취향’과 만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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