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길의 시네마 올레길] 외로운 수컷들의 가슴 뛰는 공감
타이틀 : 히트(HEAT)
감독 : 마이클 만
출연 :?알 파치노, 로버트 드니로
제작국가 : 미국
개봉 : 1996년
1. ‘리버럴 수컷’들에게 바치는 액션 마초 영화
여기 두 남자가 앉아 있습니다. 저녁 무렵 미국 LA 근교 작은 레스토랑. 테이블 왼편 남자는 알 파치노, 오른편은 로버트 드니로. 할리우드 두 거물이 함께 출연한다는 것만으로도 영화계 뉴스가 되고 전 세계 영화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히트>는 영화DVD 대표적 스테디셀러로 꼽히며 마니아들의 영구소장 목록 수위에 올라가 있습니다.
이 오래 전 영화는 여전히 남자들의 가슴을 벌렁거리게 합니다. 상영시간은 3시간에 육박합니다. ‘꾼’들이 내뿜는 열기는 가슴을 때리는 음향에 편승해 출렁거립니다. 힘 떨어지고 맥 빠진 요즘 사내들의 소심함을 향해 기관총 갈기듯 연쇄 가격합니다.
하는 일이 고만고만하고 판에 박힌 일상이 지겹지 않나요.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울며 겨자 먹듯 꾸역꾸역 살고 있나요. 혹시 (어릴 적부터 몰래 키워온) 눈 깜짝할 새 은행돈 수백억을 훔치는 쌈박한 은행털이를 꿈 꿔본 적이 있나요.
뭔가 짓눌려 가슴 답답하고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가 있습니다. 애들 키우고 그저 아파트 몇 평 늘리기 위해 묵묵히 세월을 바쳐야 하는 비루함. 과장 부장 자리 하나 꿰차기 위해 모든 것을 참고, 위아래로 능구렁이 둔갑술을 펼쳐야하는 아득함. 이런 자괴감에 휩싸일 때 영화 ‘히트’를 꺼내 봅니다.
진정한 사내들의 카리스마를 그립게 하고 나태한 정신의 이마를 툭 때리는 영화. 잊혀져가는 야성을 다시 꿈틀거리게 합니다. 남자들 내면에 잠재된 일확천금 한탕주의 심리를 입체적으로 건드립니다. 하는 일에 있어선 최고의 프로페셔널이지만 내심 외롭기 짝이 없는 수컷들. 평범한 것을 못 견디고 남들이 외면하는 길만 골라가는 ‘리버럴 수컷’들에게 바치는 액션 마초 영화입니다.
2. 수사팀과 범죄그룹의 일진일퇴 기싸움
LA 경찰국 강력계 수사반장인 빈센트 한나(Vincent Hanna, 알 파치노). 범죄가 들끓는 대도시를 종횡무진하며 본능적으로 범죄의 냄새를 맡는 외로운 사자. 살인사건 해결을 위해 24시간 깨어있을 것 같은 그의 의식은 때때로 광기에 가깝습니다.
들여다보기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시신을 일별하자마자 정확하게 사건 본질을 감지하고 수사방향과 탐문 대상을 지시하는 프로페셔널 리더십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하지만 일 중독에 빠진 고독한 중년은 세 번째 결혼생활마저 흔들리고 있습니다.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너무나 서툽니다. 일상적 안온함에 타협하지 못합니다.
완벽에 가까운 치밀함으로 늘 완전범죄를 기도하는 닐 맥컬리(Neil McCauley, 로버트 드니로). 절제된 카리스마가 블루 톤 화면에서 잔뜩 배어나옵니다. 욕망의 도시, 자본주의 목돈이 모이는 숨통을 정확히 겨냥하는 도시의 사냥꾼.
그를 중심으로 모여든 프로페셔널 범죄꾼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멋지게 한판 해치우는 닐 맥컬리는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온 사랑에 움찔 놀랍니다. 사랑이 자신을 흔들어 놓자, 사랑하는 여인과 동행을 꿈꾸며 어디론가 도피할 곳을 찾습니다. ‘최후의 한판’을 멋지게 디자인하여 완벽하게 해치운 다음에 말입니다.
LA 범죄세계의 고수들이 모여 대낮에 은행 영업점을 터는 정면승부를 기획합니다. 장물아비를 통해 설계도가 구해지고 공간분석 시간분석에 착수합니다. 해커는 사전에 은행 컴퓨터망에 침입해 보안시스템을 해제시키는 프로그램을 준비합니다.
알 파치노(한나 반장)는 로버트 드니로 일당이 벌였던 별도 범죄사건을 수사하다가 드니로 팀이 보통 범죄꾼이 아니라고 직감합니다. 이들이 한바탕 커다란 것을 꾸미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밀착감시에 들어가고 탐문수사 물증확보에 나섭니다.
드니로 팀도 알 파치노 팀의 수사그물망이 자신들을 향해 조여 오는 것을 감지합니다. 티 내지 않고 ‘잠수’한 채로 ‘작업’을 계속합니다. 드니로 일당은 알 파치노 수사망에 먼저 한방 먹입니다. 황량한 컨테이너 기지에서 거짓 범죄기획 연출을 하자, 이를 포착한 알 파치노 팀은 가짜 범죄 기획인 줄 모르고 수사요원들을 드니로 그룹에게 전원 노출시키고 맙니다. 큰 건을 앞에 두고 수사팀과 범죄그룹은 일진일퇴 기싸움을 벌입니다.
3. 쫓는 자와 쫓기는 자는 옅은 미소를 나눈다.
고수는 고수를 느낍니다. 알 파치노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드니로 차를 유도하여 멈추게 한 뒤 첫 대면을 합니다.
“커피나 한잔 할까”
“좋지, 가지”
쫓고 쫓기는 자의 처지지만 묘하게 동질감과 유대감을 느끼는 라이벌. 두 고수의 탄탄한 내공이 화면 가득 팽팽합니다. 레스토랑에서 커피 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두 사람. 불꽃 튀는 대화.
파치노 : 풀섬 감옥서 7년을 살다 나왔는데 다시 들어가고 싶나. 나는 지금이라도 금방 잡힐 일당들을 쫓고 있어. 어때?
드니로 : 얼간이들을 상대하고 있나보군. 자넨 내가 술집이나 터는 강도로 보이나?
파치노 : 천만에. 하지만 일을 꾸미진 말게.
드니로 : 난 나대로 갈 테니 자네는 자네대로 나 같은 놈을 막게나.
파치노 : 평범한 생활은 싫다 이 말이지?
드니로 : 바비큐 먹으며 TV 야구게임이나 보란 말이지. 자네는 그렇게 사나?
파치노 : 나도 아냐. 한마디로 엉망이지. 마누라는 세 번째데, 그것마저 파경직전이야. 의붓딸은 골칫거리고 친아빠란 녀석은 웃기는 짬뽕이야. 자네 같은 친구들 뒤쫓다 보니 내 인생은 엉망이야.
드니로 : 어떤 친구가 이런 말을 하더군. 뭔가 위기를 느꼈을 때 30초 내에 털고 나오지 못 할 거라면 미련 따위는 갖지 않는 게 좋다고. 자네도 동의할거야. 포기할 것은 포기해야지. 그건 그렇고 우린 둘 다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파치노 : 난 이 일 말고는 다른 건 어떻게 하는지 몰라. 다른 것은 하고 싶지도 않고.
드니로 : 그건 나도 그렇다네.
쫓는 자와 쫓기는 자는 옅은 미소를 나눈다.
파치노 : 계속 같은 꿈을 꾸는데. 내가 큰 식탁에 않아 있지. 지금까지 내가 맡은 피범벅 사건들의 희생자들에 둘러싸인 채. 퉁퉁 불은 시체, 머리에 구멍이 난 시신들이 핏발이 선 채로 나를 노려보는 거야.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네. 이런 꿈을 종종 꾼다네.
드니로 : 나는 종종 물에 빠지는 꿈을 꾸는데 꿈에서도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다가 꿈을 깨지.
잠시 침묵. 두 중년의 고단한 이마에 패인 주름살이 자못 깊어 보입니다.
파치노 : 이제야 서로를 알게 되었는데. 만약 자네를 죽여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난 정말 원치 않네. 그러나 잘 들어. 만약 멍청하게 죽어서 자네 여자를 과부로 만들면 우리도 끝나는 거야, 알겠나, 브러더(Brother)!
왜, 알 파치노는 첫 대면에서 로버트 드니로를 애정 어린 ‘브러더’라고 불렀을까. 의미심장합니다.
드니로 : (잠시 말을 받지 못한다) 어떤 일에도 양면성이 있지. 자네가 날 붙잡든가, 내가 자네를 이기든가 둘 중에 하나겠지. 그래 곧 우리는 결과를 알게 되겠지. 난 망설이지 않아. 자네는 날 못 막을거야.
파치노 :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누가 앞일을 알 수 있겠나.
둘은 빙긋이 웃습니다.
4. 남자는 겉돌다 죽어가고 남겨진 여자는 쓸쓸하다.
초비상 걸린 LAPD 밀착 수사망을 비웃듯 닉 맥컬리 일당은 대낮 은행털이를 감행합니다. 타깃 은행의 보안장치를 나뭇가지 자르듯 제거한 다음 서류가방을 든 정장 차림 3인은 대담하게 M16 총으로 순식간에 객장을 장악합니다.
“전부 두 손 들고 바닥에 앉아! 해치진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은행돈이다. 귀하들의 돈엔 손대지 않는다. 자신과 가족들의 행복을 위해 엉뚱한 짓 마라. 아픈 사람 있으면 옆으로 나와 서라. 그리고 너, 목에서 열쇠 풀어!” 커다란 자루에 100달러 지폐뭉치를 가득 담아 하나씩 매고 나오는 3인은 너무도 당당합니다. 단 세 사람으로 수분 내 해치우는 은행털이는 마치 3개의 기어가 맞물려 돌아가듯 완벽합니다. 이때 스크린의 긴장감은 천정을 찌릅니다.
하지만 세상일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예전 맥컬리 일당이 한탕을 치를 때 큰 실수를 저지르고 내뺀 녀석이 다른 갱단에 붙어 온갖 정보를 발설하고 관련 정보는 LAPD 수사팀에 제보됩니다.
맥컬리 그룹이 은행털이를 마무리할 즈음, 은행털이 제보를 받은 한나 반장 팀은 총출동하여 LA 도심 한 구역을 통째로 차단합니다. 이제 액션영화 장르 명작 대열에 오른 <히트>의 명장면 도심 총격전이 벌어집니다.
세계 많은 감독들이 마이클 만 감독의 LA도심 총격전 씬을 오마주하여 차용합니다. 한국 영화 <쉬리>, TV 드라마 <아이리스>도 도심 총격전 장면을 벤치마킹합니다. 느슨하지도 빠르지도 않은 긴장감. 실제 총격 사운드를 집어넣은 리얼리즘. 완벽한 플롯. 군더더기 없는 영상미. 장중하고 임팩트 강한 음악. 마이클 만 감독의 남성주의 액션스릴은 불꽃처럼 타오릅니다.
도심을 휘저으며 소나기 총탄을 퍼붓는 총격전 속에 훔치는 일당과 이를 제압하려는 경찰. 서로 총질하는 그들의 어깨에는 왠지 외로운 수컷들의 어두운 그림자가 깃들여 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결국 홀로 남습니다. 남자는 자신의 여자를 지켜주고 늘 곁에 있고자 하나 현실은 그러하지 못합니다.
본원적으로 유목민인 남자는 항상 떠나고 싶어 합니다. 부유하는 삶의 방식을 결코 버리지 못합니다. 정주하기 바라는 여자의 희망은 언제나 배신당하고 맙니다. 이 어긋남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자는 초라하게 겉돌다 죽어가고 남겨진 여자는 애오라지 쓸쓸합니다.
(영화 속에서 드니로의 오른팔 역할을 하는 발 킬머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현장을 장악하는 코뿔소. 동료들의 퇴로 확보를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전후좌우 엄호사격을 해대는 종횡무진은 빛나 보입니다. 교두보를 구축하면서 갈겨대는 시가지 총격 씬의 주연입니다. 두툼한 입술을 앙다문 전투적 섹시함은 느와르 필름의 명장면으로 남습니다.)
호각지세에 용호쌍박의 전투가 휩쓸고 갔습니다. 드디어 알 파치노 – 로버트 드니로 두 사람이 단독 대결합니다. 공항 활주로 주변 화물보관구역엔 일촉즉발의 팽팽함이 흐릅니다. 비행기들이 쉴 새 없이 굉음을 내며 이륙하고 착륙합니다. 사냥감을 주시하며 온 신경을 곤두세운 아프리카 초원의 두 맹수. 죽느냐 죽이느냐 생사를 가로지르는 긴장감이 터질 듯 합니다.
알 파치노 뒤편 착륙 비행기를 비춰주는 활주로 조명이 화물더미 뒤에 숨은 드니로의 그림자를 순간 드러냅니다. 드니로 위치를 눈치 챈 파치노의 총구가 놓치지 않고 불을 뿜습니다. “탕 탕” 드니로 가슴에 선혈이 솟구칩니다. 쓰러진 드니로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그냥은 날 데려가지 못한다고 그랬지” 알 파치노에게 손을 내밉니다.
땀에 흠뻑 젖은 알 파치노가 다가가 손을 잡아줍니다. 드니로의 고개가 서서히 아래로 떨어집니다. 맞잡은 두 손에 세찬 밤바람이 스쳐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