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길의 시네마 올레길] “꿈꾸고 싶다, 다음 세상을…”
타이틀 : 씨 인사이드 (The Sea Inside, Mar Adentro)
감독 :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Alejandro Amenabar)
출연 : 하비에르 바르뎀(Javier Bardem) 벨렌 루에다(Belen Rueda)
제작국가 : 스페인
77회 아카데미시상식(2005) 외국어영화상
62회 골든글로브시상식(2005) 외국어 영화상
61회 베니스국제영화제(2004) 심사위원특별상
개봉 : 2007년
나는 춥고 어두운 흙구덩이로 들어가야 할 일이 무섭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의 무사한 하루하루에 안도한다. 행복에 대한 내 빈약한 이야기는 그 무사한 그날그날에 대한 추억이다. 진부하게, 꾸역꾸역 이어지는 이 삶의 일상성은 얼마나 경건한 것인가. 그 진부한 일상성 속에 자지러지는 행복이나 기쁨이 없다 하더라도, 이 거듭되는 순환과 반복은 얼마나 진지한 것인가.
— 김훈 에세이집 <바다의 기별>중 ‘무사한 나날들’ 한 부분
친구가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다. 문병 갔다가 뇌 속을 찍은 MRI 사진을 봤다. 골프공만한 크기의 종양 주변으로 반딧불 같은 새끼 종양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종양들은 스스로 발생하고 번식하며 영역을 넓혀간다. 뇌 속 종양이 커지면 주변 신경을 압박해 미각, 후각, 시각 중추가 교란된다. 종양의 MRI 사진은 무서웠다. 반딧불 같은 종양의 불빛들이 깜박거렸다. 종양의 나라는 안개가 낀 듯 싶었다. 생명 속에는 생명을 부정하고 생명에 반역하는 또 다른 생명이 서식하고 팽창한다. 이 반역은 생명현상이다. 생로병사는 생, 로, 병, 사로 따로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덩어리로 포개져서 흘러가는 것임을 알았다. 생로병사는 분리되지 않는다.
— 김훈 에세이집 <바다의 기별>중 ‘생명의 개별성’ 한 부분
죽음은 ‘저 먼 곳 낯선 것’이 아니다
2009년 5월 대한민국에 존엄사(尊嚴死)를 인정하는 대법원의 첫 판결이 나왔습니다. 그동안 존엄사 허용여부를 두고 오갔던 사회적·법률적 논란은 일단락됐으며, 존엄사에 대한 법제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재판부는 “죽음을 맞이하려는 환자의 의사결정을 존중해 환자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을 보호하는 것이 사회상규에 부합되고 헌법정신에도 어긋나지 않는다”며 “회복 불가능한 사망단계에 이른 후에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에 기초해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연명치료의 중단이 허용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존엄사로 불리는 소극적 안락사는 환자를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게 하기 위해 생명연장의 적극적인 수단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판결을 계기로 존엄사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넓고 깊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대안 없는 외마디 주장만 할 것이 아니라 법조계 의료계 종교계가 함께 나서서 공론화를 할 때입니다.
삶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죽음은 관념이면서 현실입니다. 죽음은 필멸의 과정이면서 고통의 순간입니다. 죽음은 갈림길이면서 쓸쓸한 한 줌 재만 남깁니다. 죽음에 대한 한 사회의 담론도 그 사회가 겪어내야만 숙성됩니다.
한국 사회는 아직 죽음을 ‘저 먼 곳의 낯선 것’으로 격리시키고 있습니다. 정답은 없고 모두가 개별적으로 홀로 치러내야만 하는 죽음. 삶을 껴안듯 ‘삶 너머’를 고민할 때입니다. 존엄사 문제를 다룬 스페인 영화 한편 소개합니다.
26년째 침대에 누워있는 라몬 삼페드로
바다가 좋아 선박 수리공이 되어 전 세계를 떠돌던 25살 젊은이가 있습니다. 다이빙을 하다 목뼈를 다쳐 목 아래로 전신이 마비됐습니다. 겨우 머리만 움직일 수 있습니다. 말하거나 입으로 연필을 물고 글씨 쓰는 것만 할 수 있습니다. 전신마비 환자 라몬 삼페드로는 26년째 침대에 누운 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뒤척이고 있습니다.
<씨 인사이드>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이후 스페인의 대표감독으로 급부상한 신예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Alejandro Amenabar, 1972년생)의 문제작입니다. 이 젊은 감독은 한국 관객들에게 <오픈 유어 아이즈 Open Your Eyes, 1997> <디 아더스 The Others, 2001>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주인공 라몬에게 바다는 암담한 고통을 안겨준 공간이었지만 이제는 백일몽의 환상이 펼쳐지는 공간입니다. 라몬의 육신은 2층 좁은 방안에서 한 치도 움직일 수 없는 붙박이 신세지만 그의 영혼은 시원의 바다를 헤엄칩니다.
돌봐주는 주위의 사랑에 항상 감사하고 있지만 침대에 누워만 있는 자신의 삶에서 ‘버티는 것’ 이상의 의미를 찾지 못합니다. 사랑하고픈 여인이 곁에 다가왔지만 반응하지 못하는 사랑. 솟구치는 사랑의 감정에 오히려 괴롭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머리만 살아있는 남자. 사랑하는 조카를 제대로 안아주지 못해 허탈하게 미소 짓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습니다.
“웃으며 우는 방법”을 익힌 중년 남자는 이제 자신의 불행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바로 죽음을 선택해 죽음을 통과한 다음, 다음 세상을 꿈꾸고 싶은 것입니다. 엄격한 가톨릭 사회인 스페인. 그는 국가를 상대로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요구하며 소송을 제기합니다. 눈물이 고인 커다란 눈망울에 희로애락을 달관한 듯한 표정. 라몬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막다른 처지가 아니라 선택의 대상으로 간주합니다. 生을 접을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 달라고 국가와 사회에 대해 외치고 있습니다.
정상인에게 당연한 일상의 삶이 라몬에게는 불가능합니다, 자신을 아들처럼 수 십 년째 돌봐주는 형수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먹는 것, 배설하는 것, 몸을 씻는 것, 책을 꺼내는 것, 옷을 갈아입는 것, 음악을 듣는 것… 스스로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라몬에게 삶을 연장한다는 것은, 더구나 외부의 강요에 의해서 원치 않는 삶이 지속되는 것은 끔찍한 일인 것입니다. 라몬의 존엄사 요구소송은 스페인 사법계 논쟁은 물론 종교적 논쟁까지 불러일으킵니다.
나의 생사를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권리
존엄사 인정 요청을 스페인 법정으로부터 기각당하고 1998년 자살로 생을 마감한 실존 인물 라몬 삼페드로의 실제 이야기입니다. “삶이란 본디 처절하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강변하는 영화가 아닙니다. 존엄사에 대해 무조건 긍정하는 시선도 아닙니다.
스페인 형법은 존엄사 – 안락사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라몬은 스스로 죽을 수 도 없습니다. 독극물인 청산가리를 구하기는 커녕 스스로 물컵조차 들 수 없는 신세. 죽는 결단마저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결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라몬은 자신의 죽음에 협조한 친구들이 처벌을 피할 수 있도록 합법적인 죽음을 원하는 것입니다.
라몬은 염세주의자나 절망적 비관주의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농담 잘하고 많은 책을 읽어서 지적인 대화를 좋아합니다. 자신을 위로하러 온 사람들을 오히려 위로해주는 넉넉한 사람입니다. 바그너의 선율을 사랑하고 틈틈이 詩도 습니다.
라몬은 혼자가 아닙니다. 불구의 동생을 돌보기 위해 어부를 마다하고 농부로 생업을 바꾼 착한 형.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형은 자신의 집에서 동생이 자살하는 것을 결코 용인하지 않습니다. 시동생의 욕창을 예방하기 위해서 3시간에 한 번씩 위치를 바꿔주며 수십 년째 간병을 도맡아하는 형수. 삼촌의 수족이 되어 모든 심부름을 마다않는 귀여운 조카. 죽음을 선택하려는 아들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면서도, 아들의 뜻을 말리지 못하는 늙은 아버지의 젖은 눈빛. 애정으로 탄탄한 가족 속에서 라몬이 선택하려는 존엄사는 가족의 무관심과 소외 속에서 맞닥뜨리는 절망적 자살과는 차원을 달리 합니다.
라몬의 대변인이자 법정 대리인 역할을 하는 여성 사회운동가 제네. 자신도 퇴행성 질환을 앓으면서 라몬을 찾아와 존엄사 소송을 돕는 여변호사 줄리아. 이 두 사람으로 인해 라몬의 문제는 나라 전체의 관심사가 됩니다. 두 아이를 키우는 공장 노동자 싱글맘 로사는 불쑥 찾아와 라몬를 설득하려 하지만 만남이 지속되면서 되레 그녀 스스로 삶의 의지를 되살립니다.
이 좋은 사람들은 그의 선택을 돕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런 와중에도 라몬이 생각을 바꾸길 원합니다. 라몬이 죽기에는 너무 아까운 사람이기 때문에. 낭랑한 목소리에 지적이고, 유쾌하고, 배려 넘치는 라몬. 그들은 그가 죽기 바라지 않지만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그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죽음을 바라보는 당신의 시선
영화는 스스로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합니다. 죽음은 의무인가, 권리인가. 죽을 권리를 통해 현재의 生을 묻고 있습니다. 죽을 권리는 라몬에게 주어질 수 있는 마지막 자유였습니다. 라몬의 죽음 결행을 도와줘야 하나. 사력을 다해 말려야 하나.
존엄사(尊嚴死).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숨지 않고 드러나야 합니다. 한 사회의 집단 지성이 발휘되고 공론장(公論場)에서 여러 차원의 담론이 백가쟁명하며 다뤄야할 문제입니다. 존엄사 인정 판결을 계기로 죽음에 대한 시선이 다양해져야 합니다. 존엄사는 생과 사를 분리하는 낯선 담장이 아니라 생과 사를 이어주는 익숙한 울타리로 보아야 합니다.
평균 수명이 80세를 훌쩍 넘어갑니다. 모두가 최후까지 행복하게 살고 행복하게 죽어갈 수 있을까. 사회는 상상 이상으로 차별적이고 불균등합니다. 심성이 착하다고 행복이 절로 찾아오지 않습니다. 불행은 누군가를 피해 가지 않습니다. 인간답게 죽을 권리. 품위 있게 죽을 권리. 바로 ‘삶의 권리’와 동전의 양면입니다.
아메나바르 감독이 연출 각본 편집 음악까지 도맡은 <씨 인사이드>는 2004년 베니스영화제 남우주연상과 심사위원 대상,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습니다. 라몬 역할을 맡은 스페인 톱배우 하비에르 바르뎀(Javier Bardem)의 얼굴 연기는 탁월합니다. 잘 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할 때 잘 죽고 싶은 전신마비 환자 캐릭터를 이처럼 잘 살려낸 경우는 드뭅니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엽기적 살인마로 등장, 2008년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