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길의 시네마 올레길] 괴물 쫓는 속물…숨막히는 공포와 환멸
타이틀 : 추격자
감독 : 나홍진
출연?: 김윤석, 하정우
개봉?: 2008년
우리 곁에 사이코패스가 있다
잊혀질 만하면 발생하는 사이코패스 범죄. 유영철 강호순 등이 저지른 연쇄 살인사건에 온 국민은 진저리 칩니다. 사이코패스(Psychopath, 반사회적 인격 장애자)가 저 먼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 곁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절감하게 됩니다. 좁은 땅 수천만 인구가 수도권에 몰려 살아 사회적 밀도는 하늘을 찌릅니다. 돈에 대한 욕망의 사슬이 켜켜이 얽혀진 한국사회는 인문주의적 교양의 역사가 일천하기에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용의 문화가 자리 잡지 못했습니다. 만인 대 만인의 투쟁공간에서 자기 잇속 챙기기만 횡행합니다.
승자독식 구조 속에서 경쟁 낙오자는 낭패감에 허우적거립니다. 이런 척박한 환경 속에서 범죄는 더욱 기승을 부립니다. 자신을 파괴하면서 타인의 인권마저 파괴하는 ‘묻지마 범죄’가 꼬리를 잇고 있습니다.
인지신경과학자들에 따르면 사이코패스의 두뇌는 감정조절 중추에 이상이 생겨 윤리신경회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목적 달성을 위해 타인의 처지를 의식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어릴 적에 관심과?사랑을 받지 못해 충동적 욕구를 자제하거나 조절하지 못합니다. 스스로 약자이면서 자신보다 못한 약자를 희생양으로 삼습니다.
강호순이 범죄 대상으로 삼은 사람은 전부 스스로를 완력만으로 방어할 수 없는 나약한 여성이었습니다. 피해자는 대부분 키 160cm 이하인 데다 작은 체구였습니다. 살인범은 사전에 꾸민 함정에 피해자를 빠뜨려 살인을 자행한 확신범. 우발적 범행이 아니었습니다. 사이코패스가 저지르는 파괴적 현장을 생생하게 연출한 영화가 <추격자>입니다.
괴물과 속물
<추격자>는 관객을 쥐어짜는 영화입니다. 극장을 나선 뒤 감동받아 훈훈해지는 것이 아니라 산다는 것이 허깨비 같다는 극도의 환멸감을 던져 줍니다. 대개 영화는 사랑의 기쁨, 이별의 고통, 음모와 복수, 도전과 응전, 일상탈출과 판타지를 보여줍니다. 유혈이 낭자한 <추격자>는 다릅니다. 무지막지한 살인 폭력이 우리 일상 바로 곁에 음습하게 똬리를 틀고 있음을 100% 실감하게 합니다. 상영시간 123분 내내 부조리한 그늘이 드리워진 칙칙한 영상이 증폭됩니다. 좁디좁은 산동네 골목길을 오르내리며 관객의 심장에 망치질을 해댑니다.
정부 수립 이후 최악의 연쇄살인사건이었던 유영철 사건을 모티브로 했습니다. 살인마 유영철은 2003년 9월부터 2004년 7월까지 주로 부유층 노인과 여성을 상대로 총 21명을 잔인한 수법으로 살해했습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 신인 감독은 “우리 주변에 살인이라는 특별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의 반응을 그리고 싶었다”고 제작의도를 밝힙니다. 나홍진 감독은 한국사회에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작심하고 중층적 메시지를 던집니다. 영화감독은 작품 연출로 시대 발언을 합니다.
살인기계가 돼버린 30대 중반 사회 부적응자. 비리를 저질러 쫓겨난 전직 경찰. 두 사람간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무박2일간 서울 마포구 망원동 골목길에서 펼쳐집니다. 이 둘이 휘젓고 다니는 공간은 공권력이 제대로 살아있고 사회 안전시스템이 온전히 작동되는 곳이 아닙니다. CCTV로 관리되는 안전한 중산층 거주지와 멀리 떨어진 곳. 먹고살기 힘겨운 사람들이 초라하게 둥지 튼 어두운 골목길. 한국형 스릴러 속 괴물은 이곳에 아지트를 꾸미고 있습니다.
치안을 비웃으며 유유히 활보하는 괴물. 전직 형사 엄중호는 보도방을 차려놓고 성매매 불법영업을 하는 속물. 괴물은 콜걸들을 호출해 자신의 살인 작업장에서 엽기적으로 해칩니다. 자신에게 현금을 납입해야만 하는 여인들이 하나둘 사라지자 속물은 여자들을 찾아 나섭니다. 전직경찰 속물은 드디어 밤 골목길에서 괴물과 마주칩니다.
“우리 엄마, 어디 있죠?”
미진은 속칭 콜걸. 그녀에겐 7살짜리 딸이 있습니다. 보도방 사장 엄중호는 몸살로 몸져누운 미진을 닦달해 영업을 강요하고 미진은 살인마의 소굴에 갇힙니다. 휴대전화마저 터지지 않는 살인 작업장. 곳곳에 사체 흔적이 묻어 있습니다. 꽁꽁 묶인 미진의 두 눈엔 죽음에 내몰린 존재의 공포가 철철 넘칩니다. 이때부터 몸서리쳐지는 서스펜스에 빠지게 된 관객들은 전율하게 하는 미진의 운명에 꼼짝없이 동행해야 합니다.
연쇄살인 피해자 콜걸들을 우리와 다른 종자들이라고 술자리 안주삼아 떠벌렸던 익명의 우리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죄책감과 양심의 고통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합니다. “우리 엄마, 어디 있죠.” 울부짖는 미진의 일곱 살 딸의 커다란 눈망울을 피해갈 수도 없습니다.
“너 하나 없어져도 누가 찾아올 사람이 있을까” 살인마 지영민 마저 비웃는 취약한 계층. 오직 사랑하는 딸과 먹고 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살았던 미진. 살인도구가 담긴 연장 가방을 내려놓는 괴물 앞에서 재갈 물려진 미진은 절규합니다.
상부의 질책이 두렵고 책임공방에 우왕좌왕하는 공권력은 무기력합니다. 매스컴에만 신경 쓰는 서울시장은 우스꽝스럽고, 담당검사는 이기적인 ‘책상물림’일 뿐입니다. 콜걸 실종 탓에 영업 손실에만 신경 쓰는 엄중호는 차량 접촉사고로 살인마와 맞닥뜨리고, 지영민은 경찰에 넘겨집니다.
형사 앞에서 연쇄살해범 영민은 자신이 12명이나 죽인 살인마라고 실토하지만 ‘또라이’로 간주돼 되레 증거불충분으로 다음날 풀려나고 맙니다. 영민의 누나 부부를 찾아내 영업 손실을 물어내라고 윽박지르다 희대의 사이코패스 내력을 이제야 감지한 엄중호. 이제 미진의 실낱같은 목숨이 오직 자신에게 달려있음을 절감하고 형사 시절의 직감을 회복합니다. 풀려난 살인기계와의 숨찬 추격전은 하루를 넘깁니다.
탄탄한 스토리, 팽팽한 연기
추격자는 관객들에게 일찌감치 누가 범인인지를 밝히고, 추격하는 주인공만 헤매게 만드는 스토리전략을 구사합니다. 관객들은 이미 미진의 운명에 일희일비하도록 붙들려 있습니다. 영화는 과장된 몸짓, 특수효과에 기대지 않고 리얼리티를 추동력 삼아 긴박하게 밀고 나갑니다.
막가는 인격장애자가 휘두르는 잔인한 폭력, 결코 착하지 않는 속물 인생들, 생계전선의 대안이 없는 취약한 여인들…. 기발하고 작위적인 공포가 아닌 서울의 어두운 골목길에 서린 음습한 공포가 뚝뚝 흐릅니다. ‘인생은 아름답다’는 생각이 발붙일 구석 하나 없습니다.
두 주인공 김윤석 하정우의 광적인 연기는 뒤엉킨 근육의 팽팽한 대결로 불꽃이 튑니다. 꽃미남 꽃미녀의 버벅거리는 연기로 버무린 기존 한국영화들을 저만치 떨쳐버립니다. 시퍼렇게 날선 두 캐릭터가 두 시간 동안 조금도 무뎌지지 않고 날카롭게 맞섭니다. 상업적 장편영화를 처음 찍는 젊은 감독은 수년 동안 시나리오를 다듬고 벼려왔습니다. 탄탄한 스토리는 현실감 있는 설득력을 발휘합니다. 이것저것 뒤섞지 않는 집중된 편집역량은 관객의 호흡을 가쁘게 몰아대는 속도감으로 솟구칩니다. 영화는 2008년 한국영화 주요한 상들을 휩쓸고 해외에서도 호평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