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원의 포토차이나] 소가툰(甦家屯)의 화원신촌(花園新村)
소가툰은 1939년 김성수 씨가 자본금 천만 원으로 남만방직주식회사를 설립한 곳이다. 당시 소가툰역은 심양과 대련·단둥을 연결하는 화물기지로서 심양역과 함께 교통의 요지였으며 상당수의 한인이 거주했다.
소가툰 최초의 조선인 마을은 1934년에 건설된 신흥촌이다. 해방이 되자 동북 삼성의 50개 현에서 몰려든 조선인들이 성신농장과 동신농장, 파산농장에 거주하면서 소가진의 한족들이 합쳐서 연맹사가 되었다가 1957년 분리되면서 성광촌, 홍성촌(59년) 등을 건설했고 그 후 연맹촌을 거쳐 1995년 아파트를 건설하면서부터 ‘화원신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초기 이곳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 경상도 출신이었고, 그들은 입소문으로 일가친척과 친구들에게 연통함으로써 계속 경상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타지방에서 온 사람들도 경상도 사람들에게 휩쓸려 경상도 촌으로 발전했다.
1949년부터 조선족들은 지금의 화원신촌 일대의 넓은 들을 개간해 논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주민들은 넓은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으며 개혁·개방 이후에는 연해 도시나 한국으로 빠져나가는 등 마을의 공동체가 보장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촌지도부는 주민들이 안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는데 단지형 문화주택을 건설하는 것이 조선족의 정체성과 문화적 혜택을 누리면서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데 의견을 모았다. 여건은 좋았다. 황뤈신촌은 심양과 붙어있고 소가툰 시내와는 자전거로 10분 내외 거리에 있다. 소학교와 초중고등학교가 인근에 있으며 도로망도 6차선으로 시원하게 뚫려있다.
아파트 건설을 위해 1995년 1기 공사가 착공되었다. 마을은 그동안 공업단지를 조성해서 만든 기금 50만 원과 개인 자금 200만 원을 종잣돈으로 활용하였다. 그래서 5기 공사가 마무리된 지금 13동의 아파트 670세대가 순조롭게 분양되었고 예식장, 무도장, 노래방, 당구장, 볼링장, 문구장, 사우나, 세탁소, 도서관, 테니스장, 헬스장, 롤러스케이트장, 어린이 놀이터, 유아원과 유치원 등 7만 5천㎢의 부대시설이 건설되어 단지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화원신촌을 찾아가는 길은 서탑에서 심양 시가지를 가로질러 요양으로 가는 길로 30~40분 정도 달리면 소가툰이 나오고, 소가툰에서 연지(蓮池)가 있는 청년교를 지나 1㎞쯤 가면 왼쪽으로 6층 높이의 빌딩으로 된 아파트촌이 나타난다. 마을 입구에는 항상 버스와 인력거, 택시 등이 대기하고 있다.
촌정부 건물 옥상에 올라가면 깔끔하게 단장된 아파트가 양옆으로 세 줄로 늘어서 있고 마을의 상징물인 금색의 봉황새 뒤로 조선족 문화를 나타내는 물레방아·화단·놀이터·광장 등이 시원스럽게 보인다.
촌 정부 1층에 있는 도서관은 한국 서적을 포함해 15,000여 권의 장서가 있다. 해마다 2만 원을 도서구입비로 책정하여 중국·한국·북한·조선족 잡지 60여 종과 20여 종의 신문, 신간서적 등을 구입하고 있으며 세계 여러 나라의 각계각층에서 기증도서를 보내오고 있어 학생들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많이 이용하고 있다.
도서관 오른편에는 무도장이 있는데 넓은 홀에는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아침부터 중년 남녀들이 춤을 추고 있고 구경을 하는 사람도 볼 수 있다. 한국의 무도장은 대개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춤을 추는 데 반해 이곳에는 무도장 안 모든 사람의 얼굴을 식별할 수 있을 만큼 밝으며 주민들의 사교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사교춤이 스포츠로 느껴지며 모두가 경쾌하게 스텝을 밟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중국에서는 학교에서 정규교과목으로 사교춤을 가르치고 있다. 노인협회 등을 통해서도 보급하기 때문에 춤추지 못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춤이 일반화돼 있다. 따라서 익숙하지 않은 우리의 춤 문화와는 달리 춤은 모든 사람이 즐기는 생활의 일부분이다.
노인정에서는 20~30명의 노인들이 화투 등으로 소일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할머니였고, 문구장에는 남녀의 비율이 비슷하였다. 2002년 8월 촌 정부가 설립해 이양한 유치원은 촌 정부 반대쪽 아파트 끝자락에 있는데 2003년 40명, 2004년 100명, 2006년에는 130명으로 원생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아파트 바로 뒤에는 1학년이 4개 반으로 전교생이 800명 규모인 소학교가 있으며 그 뒤에는 심양시 조2중이라고 불리는 중고등학교가 있다. 이들 학교는 학급당 인원이 50명이며 중학교는 1~2학년이 4개 반, 3학년이 6개 반이고 고등학교는 일률적으로 4개 반으로서 심양시 일원의 조선족 학교 중 가장 큰 규모로서 300명 규모의 기숙사가 있다.
마을의 성장 동력이 되고 있는 공업원은 아파트 동남쪽 0.5㎞ 지점에 있다. 이 마을 출신들이 경영하는 회사 10여 개와 합작기업을 포함해 20여 개의 기업이 있으며 기계 제작, 화장품제조, 조명기구, 수도 배관 부품 등 다양한 물건들을 생산하고 있다.
그중에서 이 마을 출신인 강성욱 씨가 경영하는 심양구일산업유한공사는 주택이나 아파트의 하수도나 배수관의 부품을 생산하여 북경, 상해, 대련, 천진 등지로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종업원이 60~70명이고?연 1500만~2000만 원 정도의 매출을 기록하고 있으며 건설경기 부양에 힘입어 매출액이 증가할 것으로 기대한다.
화원신촌은 아파트를 건설하기 전 연맹촌 시절에는 350세대의 주민들이 있었으나 아파트촌으로 변모한 후에는 670세대 2000여 명으로 점차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 그것은 교통이 편리하고 시내, 병원 등이 인근에 있어서 일상생활이 편리하고 조선족의 정체성을 간직한 문화적 생활을 공유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민 모두가 조선족이다. 마을의 규모가 커서 유치원에서부터 고등학교까지 조선족 교육시설이 인근에 있으며 공기가 맑고 오염이 적어서 위생적이고 청결한 생활을 할 수가 있다.
이처럼 모든 생활조건이 심양 시내보다 못한 것이 없는 데 비해 집값은 반값 정도로 싸며 생활비 지출이 적게 든다. 1999년 이주한 신현필(75세, 왕청현 출생)씨는 목단강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성 시에서 교사로 있다가 1989년 이곳으로 이주했다. 그는 부인과 함께 손자와 외손녀를 돌보며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그의 아들은 소련 등을 상대로 무역업을 하다 며느리와 함께 한국으로 취업해 나갔으며 딸은 한국으로 시집갔다.
2003년 반금시에서 이주한 박재근(74)옹은 반금시에 조선족 학교가 없어지자 조선족과 함께 어울려 살 곳을 찾다가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데 한족 학교에 다니던 손녀를 조선족 학교에 보내면서 만족해하고 있다. 그는 두 아들과 두 딸을 두었는데 큰아들과 큰딸은 한국으로 취업해 갔으며 둘째 아들은 청도에서 사업하고 둘째 딸은 한국으로 시집간 지 10년이 된다. 그래서 96세의 어머니 류학연(대구 출신)과 부인 김춘자(68세), 큰며느리와 두 손녀가 함께 살고 있다.
또 그는 1958년 연변문학에 “자랑”이라는 시를 발표하였고 개혁개방 후 랴오닝 성의 첫 시집에 “빛나는 아침”을 발표한 문인이다. 그래서 이곳으로 이사를 오니 심양의 조선인문학회 사람들이나 한국의 시인들과 교류를 할 수 있어서 매우 좋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문단의 시 세계에 등단 했고 한국 잡지 등에도 초대되어 작품을 발표하는 등 왕성한 활동으로 보람찬 여생을 보내고 있다.
이렇듯 화원신촌에 사는 주민 대부분은 어린이들과 노인들이며 30%를 차지하는 청장년층은 대부분 한국 등 외국이나 대도시나 임해도시로 진출해 농사를 짓는 사람은 없다. 주민들의 소유인 토지는 농사를 짓고자 하는 사람(대부분 한족)들에게 임대하고 있다. 그리고 1982년부터 합작사 시절부터 마을의 만 60세 이상의 주민을 대상으로 농사에 12년 이상 종사한 사람들을 12년, 14년, 16년, 18년 등 4개 등급으로 나누어 퇴직 연금을 지급하고 있는데, 현재 최고 1인당 연 2400만원으로 기초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주 수입원은 노무수출로 벌어온 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