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원의 포토차이나] 신흥무관학교

일제에 의한 강제 병합이 다가오자 신민회 회원들은 국내에서의 대일항쟁의 한계성을 절감하고 서간도에 제2의 독립운동 기지를 선정할 것과 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하고 독립전쟁을 전개한다는 방침을 추진했는데 1909년 봄에는 후보지로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를 선정했다.

<경학사 취지서>가 낭독되었던 대고산

이회영·이시영 일가와 6형제는 이상용·김동삼·이동녕·김창환·여준·주진수 등 망명한 신민회 회원들과 함께 1911년 4월 성경성(盛京省) 유하현 삼원포 대고산(大孤山)에서 이주한인 300여 명을 모아 노천대회를 개최하면서 서간도(남만) 최초의 한인자치단체인 경학사(耕學社)를 창립했다.

대고산 중턱에서 바라본 추가가 마을. 앞에 보이는 긴 건물이 학교 자리라고 한다.

그들은 첫째, 자치기관의 성격을 띤 경학사를 조직할 것, 둘째, 전통적인 도의에 입각한 질서와 풍기를 확립할 것, 셋째, 개농주의(皆農主義)에 입각한 생계방도를 세울 것, 넷째, 학교를 설립해 주경야독의 신념을 고취할 것, 다섯째, 기성군인과 군관을 재훈련해 기간장교로 삼고 애국청년을 수용해 국가의 동량인재를 양성할 것 등 5개 항을 결의했다. 이날 노천대회에서는?경학사 사장에 이상용을 추대하고 내무부장 이회영, 농무부장 장유순, 재무부장 이동녕, 교무부장 유인식을 선출했다.

경학사는 이름 그대로 낮에는 농사를 지어 주민들의 생계를 도모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곳이었다. ‘밤의 공부’ 중에는 야간 보행을 비롯해 군사훈련이 따랐다. 낮에 군사교련을 하면 중국 측의 공연한 오해를 살 것을 염려해 야간을 택해 실시한 것이다.

이와 같은 경학사 회원들의 노력으로 삼원포에는 애국동포들이 계속 모여들기 시작했으나 경학사?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중국정부는 생활의 기반을 마련코자 하는 한인들에게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게 했으며, 한인들의 왕래도 제한했다. 이에 경학사에서는 이회영을 대표로 심양과 북경에서 중국 측과 협상을 하도록 해 중국 지방정부의 협조를 받아 해결했다.

그러나 개간 첫해 농사는 대흉작으로 다음 해의 종자마저 식량으로 먹어야 할 정도로 가을걷이를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고 식수가 모자라 나무뿌리에 고인 물을 먹었다가 지독한 풍토병에 걸려 목숨을 잃기도 했다.

강 건너에서 바라본 신흥학교 터. 논 뒤로 합니하가 흐르고 있다. 그 위 언덕이 학교 자리였다.

1911년 여름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鄒家街)에서 경학사 주도로 무관 양성을 위해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했다. 당시 지방 토착민들은 신흥강습소를 일본의 앞잡이로 알고 땅을 빌려주지 않아 교사를 구할 수 없게 되자 겨우 옥수수 창고를 빌려 개교식을 했다.

운영은 양기탁 등의 국내 모금과 이석영의 지원으로 운영될 계획이었으나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국내 모금이 중단됐기 때문에 재만 동포들의 기부금을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이석영에게 의존했다.

그리고 1911년에는 풍토병과 가뭄,?서리 등의 천재가 겹쳐 신흥강습소 유지가 어려웠지만 1912년부터 풍년이 들기 시작해 여준·이탁 등을 중심으로 신흥학교유지회를 조직, 각 지방에서 재정을 갹출해 경비를 충당하고자 노력했다.

대두자 신흥무관학교 자리에 사는 중국인 류분재

신흥강습소는 1912년 통화현 합니하로 이전해 신흥중학으로 교명을 개칭하고 중학반과 군사반을 두었는데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고 압록강을 건너 탈출한 많은 애국청년이 학교의 명성을 듣고 찾아오자 학교 확장이 시급함을 인정하고 하동(河東)의 대두자(大?子) 지역에 40여 간의 병사와 수 만평의 연병장을 부설해 1919년 5월3일 학교이름을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개칭했다.

대두자는 유하현 고산자에서 약 15리쯤 동남쪽 좁은 길로 들어간 오지로 한족회 중앙총장인 이탁, 재무부장 남정섭 등 애국지사들이 집단촌을 이루어 살았던 곳이다. 현재 이곳의 행정명은 유하현 전승향(全勝鄕)이다.

님웨일스의 『Song of Arirang』의 주인공 김산(장지략)도 대두자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는데?그는 “학교는 산속에 있었고?18개 교실로 나뉘어 있었는데 눈에 잘 띄지 않게 산허리를 따라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신흥무관학교 터 앞에는 허름한 중국인 소유의 집이 학교 지점을 알려주는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집 뒤로 보이는 옥수수밭이 신흥무관학교 자리이며 집 앞의 논이 우물터였다고 한다

학교터는 옥수수밭으로 덮여 그 면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 집을 통과하여 옥수수밭을 헤치고 들어가 당시 약간의 기초석과 게양대 기반석이 남아있는 곳으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국기게양대 기반석 자리를 설명하는 주귀유 씨

안내자인 중국인 주귀유(朱貴有, 1953년생) 씨는 어릴 적 부모로부터 버려져 독립군의 심부름을 했던 김씨 성을 가진 한인이 거두어 키웠기 때문에 신흥무관학교와 한국독립군의 얘기를 들어 알고 있다면서 밭 가운데에 신흥무관학교의 국기 게양대 흔적과 집 앞의 논 한가운데 우물터의 흔적을 안내해 주었다. 그리고 1950~1960년대에 인근 주민들이 집을 지을 때 신흥무관학교의 기초돌들을 가져다 썼다고 한다.

신흥무관학교 교육과정은 하사관 반이 3개월, 특별훈련 반이 1개월, 장교 반이 6개월이었으며 폐교될 때까지 2,100여 명의 독립군을 배출했다. 그리고 근대지향적 인간의 덕성교육과 경제·교육·과학·교육 및 사범 교육을 했으며, 국어·국사·지리교육을 강조하는 등 군사교육과 더불어 민족정신 함양에도 노력했다. 그것은 투철한 민족의식을 가진 인재 양성이 일제를 물리칠 수 있는 중요한 방법의 하나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신흥무관학교는 1919년 6월에 유하현 고산자로 다시 이전하였다. 1919년 7월 하순에는 고산자에 있는 신흥무관학교 본교의 윤기섭 교감·박영희 교관 이하 학생 여러명이?마적들에게?납치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리고는 일제의 토벌과 마적의 습격, 윤치국 치사사건 등으로 결국 1920년 8월에 폐교되었다. 이후 지청천은 차선책으로 교성대(敎成隊)를 조직해 백두산으로 이동, 재기를 모색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의 활동지역은 만주와 중국의 본토 등지로 나눌 수 있지만 학교가 만주에 있었기 때문에 만주에서 활동한 졸업생이 많았으며 대표적인 무장독립운동단체로서는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대한통의부·정의부·신민부·국민부 등이 있다. 중국본토 지역에서는 의열단과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을 들 수 있다.

광화촌 제7촌민소조의 모습

신흥중학이 있었던 곳은 통화현 합니하 광화진 통화시에서 승용차로 1시간 반 정도 걸린다. 합니하는 광화진 중심소학교를 지나면서 보이기 시작했고 흔들다리를 지나 우측 길로 들어서서 신흥중학 자리였던 광화촌 제7촌민소조가 나온다. 이곳은 야산 언덕으로 제7 생산조 16호 50여 명의 한족이 산을 깎아서 개간한 밭에서 소를 키우며 살고 있었으며 강 건너에는 포도밭과 묘목을 키우는 수목원 등이 들어서 있었다.

신흥학교의 주춧돌이 나온 자리에서 설명하는 함수보 씨

마을 주민 함수보(咸樹寶,1959년생) 씨는?이곳에 집을 지을 때 신흥중학의 주춧돌이 나왔고 그것들은 이곳 주민들이 집을 지을 때 사용했다고 한다.

‘합니하’는 유하현에서 통화현으로 흘러 내려오는 강의 이름이지만 강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강변의 넓은 평지 일부분을 일컫는 것으로 1912년 당시 합니하 고려관자(高麗館子)로 불리면서 동남쪽으로 고뢰자(高磊子), 북쪽에는 청구자(靑溝子) 남서쪽에는 료가동(鬧家洞) 등 태산준령과 심산유곡 그리고 밀림이 펼쳐진 난공불락의 요지로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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