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원의 포토차이나] 용정의 특산물 ‘사과배’
1921년?조선족 최창호가 개량···용정 모아산 4월이면 흰눈꽃 축제
연길시에서 용정시로 가다 보면 오른편에 모자의 형상을 하고 있는 모아산이 보인다. 모아산은 1920년 경신대참변을 취재하던 <동아일보> 장덕준 기자가 피살당한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산기슭에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과수원이라고 하는 1만3000ha의 사과배(?果梨, p?nggu?l?) 농장이 자리 잡고 있어 해마다 4월 말이면 드넓은 밭에 피어 있는 흰꽃이 온 세상을 새하얀 눈으로 덮고 있는 듯 아름답게 보인다.
중국에서 핑구어리라고 부르는 사과배는 1921년 최창호에 의해 탄생되었다. 조선 함경북도 경성군 출생인 최창호는 1909년 증조부를 따라 중국의 안도현 내두산으로 이주했고 1916년에는 용정시 로토구진 소기촌으로 이사를 했다. 이곳에서 그의 가족들은 벼농사 뿐만 아니라 과수농사도 지었다.
1921년 그의 동생인 최범두가 어른들을 따라 북청에 놀러가게 되었다. 그는 동생에게 북청의 과일나무 곁가지를 가져달라고 부탁했다. 동생은 북청의 배나무 곁가지 6개를 가져왔다. 최창호는 이것을 움 속에서 보관하였다가 이듬해 4월 집 부근에서 자라고 있는 2~3년생 돌배나무에 접을 붙였다. 이 나무는 5월에 새싹이 돋았고 다시 그 이듬해에는 세 개가 살아 남아 무럭무럭 자랐는데 1927년 봄 흰꽃이 피고 열매가 달렸다.
과일은 노란 색을 띄는가 하면 빛을 많이 받은 쪽은 사과처럼 붉은 색깔을 띄었다. 달고 수분이 많으면서 시원한 청량감을 주는 독특한 맛이었다. 또 저장이 쉽고 저장하면 숙성이 되어 그 맛이 부드러워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맛과 품종에 확신이 선 최창호는 인근의 친지들에게 접가지를 나누어주면서 보급에 나서자 소기촌에는 3ha의 사과배 농장이 들어서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참배 혹은 큰배라고 불렀다.
최창호가 재배한 참배의 명성이 퍼져나가자 로토구를 비롯하여 화룡, 도문 등 연변의 각지로 사과배 재배 지역이 늘어났다. 그리고 사과배의 품종에 관심을 가진 연변 조선족자치주 정부는 1951년 용정의 모아산 자락에 공식적인 과수농장을 건설하게 된다.
그리고 1952년 동북농학원 교수인 주음을 비롯하여 길림성농업과학연구소 고모, 장가책 등 연구원, 길림성농업학교 축경림 교수, 형자연, 리창복, 리순재, 조환순, 류순례 등 연변의 농학자들이 참여하는 길림성 과일품종 조사팀은 소기촌에 머물면서 생산된 참배의 정밀검사를 거쳐 새로운 품종임을 확인하고 정식으로 사과배로 명명하였다. 그 후 사과배는 연변의 모든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조선족신세’에 종종 비유···’설움’보단 ‘자부심’으로 승화를?
중국의 동북삼성은 동절기가 길고 무상기가 짧아서 과수농사가 활발하지 못하였고 물류비용 등으로 타지 과일들이 입하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사과배가 생산되던 초기에는 현지에서 생산되는 과일로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소득수준이 높아지고 고속도로망이 구축되는 등 전반적으로 교통인프라가 구축되자 외지의 이름난 과일들이 속속 들어오게 되었고 신농법의 개발 등으로 연변에도 다른 품종의 과일들이 많이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사과배의 수요는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그래서 2000년대 초반에는 가을에 생산된 사과배를 팔기위해 산지주민들이 천막을 치고 이듬해까지 길손들에게 사과배를 팔고 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생산방법을 개량하여 양질의 사과배를 생산하기 시작하였으며 적극적인 홍보활동과 토산품이 신토불이라는 개념이 확립되는 등 연변의 명물로 자리를 잡았고 사과배의 오묘한 맛에 이끌린 타지 사람들이 찾기 시작하면서 전 중국은 물론 한국에까지 그 명성을 떨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중국의 조선족은 대부분 코리안 드림과 도시화 산업화의 바람에 휩쓸려 정든 농촌을 떠나고 있다. 아름답고 멋진 과수농원과 농가주택에 사람이 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자녀들의 교육문제, 직장생활, 그리고 보다 나은 문화생활 등을 위하여 모두들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고 있는 것이다.
한동안 조선족이 떠난 농촌의 산골짜기에 탈북자들이 모여서 살고 있는 것을 본 일이 있다. 조선족들은 탈북자들에게 집과 식량을 주고 농장관리와 과수재배를 부탁하였고, 신분에 불안을 느낀 탈북자들은 지친 심신을 달래고 정세를 관망할 목적으로 산골짜기에 은신한 적이 있다.
핑구어리는 또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중국의 조선족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빗대어 스스로 핑구어리라고 부르고 있다. 사과도 아니고 배도 아닌, 한국인도 아니고 중국인도 아닌 중국의 조선족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의 일면을 담고 있기도 하지만 과경(過境)민족의 서러움을 표현하는 양면성도 내포하고 있다.
필자는 그 말이 혹한의 동토에서 독특한 특성을 가진 사과배와 같은 신품종을 개발한 최장호를 비롯한 조선족 농민들의 창조력과 급변하는 시대상황에서 이민족들과 부대끼며 온갖 역경을 겪으면서도 고향의 전통을 간직하고 살아온 중국의 조선족들을 새롭게 인식하는 용어로 거듭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