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원의 포토차이나] 순록 키우는 ‘어원커족’ 부부
中 소수민족 ‘어원커족’… 몽골에선 한국 뜻하는 ‘솔롱고스’
순록을 키우고 썰매를 타며 사냥을 하는 유목민족인 어원커족(鄂溫克族, Ewenke)은 필자가 2007년 연구년을 베이징에서 보내면서 탐방계획을 잡았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대상이었다. 그래서 EBS 세계테마기행에서 어원커족에 대한 작업제의를 받으면서 무척이나 가슴이 설레었다.
출발하기 전 어원커족에 대해 조사해보니?우리 민족과도 관련된 부분이 있어서 관심은 더욱?고조되었다. 어원커족은 중국과 러시아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으로 퉁구스(Tungus), 어루춘(Orochon), 비랄(Birar), 마네길(Manegir), 솔론(solon) 등의 여러 가지 호칭으로 불렀으나 현재는 어원커족의 러시아식 발음인 예벤키(Evenki)를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몽골에서는 징기스칸 시대부터 어원커족의 일족인 솔론족을 ‘솔롱고스’라고 불렀으며 이것은 현재 몽골에서 한국을 부르는 정식 명칭이 되었다.
2000년 통계에 의하면 중국 내 어원커족의 인구는 약 2만6000명으로 그중 90% 안팎이 내몽고자치구의 후룬베이얼(呼???)의 어원커족(鄂?克族)자치기 인근에 살고 있다. 나머지는 흑룡강성의 너허(?河)시 등에 분포되어 있다고 하며 고유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문자는 없다.
예전에는 전통적인 유목생활과 수렵으로 살아왔으며, 정령(精靈)을 숭배하는 샤머니즘(shamanism)의 종교관이 있었다. 수렵의 성공을 기원하는 곰 축제인 토테미즘을 중시하였으나 신 중국이 건설된 이후 많은 부분들이 사라졌고 상당수의 유목민들은 중국인들과 잡거하면서 동화되었다.
우리 일행은 어원커족과 오로춘족의 자치기와 인접하고 있으며 어원커족의 원시부락 체험마을이 있다는 근하(根河, Genhe)시를 탐방 대상으로 설정하였다.
그러나 겨울철에 내몽고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근하로 가는 길은 너무나 춥고 험난했다. 기온은 영하 30도가 예사였고 바람이 불 때는 아스팔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보라가 휘몰아쳤으며 고속도로 휴게소 등도 상당부분 휴업상태였다.
우리는 다소 돌아가는 일이 있더라도 될 수 있는 한 고속도로나 큰길을 택했다. 큰길은 공로(公路)이기 때문에 눈이 오더라도 계속 제설차가 눈을 치우기 때문이었다.
장춘공항을 출발해 송원(松原), 백성(白城) 등 길림성의 최북단을 거쳐 내몽고자치구로 들어서면서 계속 흑룡강성과의 경계지점을 통과한다. 자란툰(?蘭屯)을 지나 우란하우터(?蘭浩特), 아룽기(阿榮旗), 후룬베이얼을 지나갔다. 후룬베이얼에 도착하자 만주리까지 220km라는 팻말이 보인다. 우리가 가야할 근하는 255km, 어림잡아 계산을 해보니 근하까지 2000km가 넘는 거리다. 정말 멀리도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근하시에 도착한 우리는 어원커족의 원시부락 체험마을을 찾았다. 겨울철이라 그런지 전시관을 제외화고는 별 다른 것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전시관에는 어원커족의 삶의 모습을 기록해 놓은 사진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샤먼의 의상과 주거형태 모형 등이 전시되어 있었으나 어디에서도 순록을 키우며 살고 있는 사람들은 찾을 수가 없었다.
수소문 끝에 근하에서 160km 정도 떨어진 아룡산(阿龍山)에 가면 순록을 키우며 살고 있는 원주민을 만날 수 있다고 하여 아룡산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아룡산에서도 원주민은 만날 수 없었고 60km 떨어진 곳에 원주민 부부가 순록과 함께 살고 있다고 한다. 지도를 보니 중국에서 가장 춥고 오로라를 볼 수 있다는 막하(漠河)까지는 100km남짓 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다음에는 꼭 막하를 가보리라 다짐을 하였다.
원주민 부부가 살고 있는 곳은 아룡상의 난차지역이라고 한다. 눈길이고 길이 좁아서 현지에 4륜구동의 차량으로만 접근이 가능했다. 자동차가 서로 교차하기도 힘들 정도로 좁은 길을 아룡산에 살고 있는 안내자와 함께 두 시간 가까이 달렸다.
원주민부부의 천막은 도로에서 채 100m가 넘지 않았다. 원래 그들의 전통 가옥은 나무를 원뿔 모양으로 세우고 여름에는 자작나무 껍질, 겨울에는 모피를 두르고 윗부분에 연기가 나갈 수 있도록 굴뚝 비슷한 것을 만들어 사용하였으나 현지에는 국가에서 지급한 군용천막을 치고 살고 있었다. 전통가옥을 지을 줄 아는 사람이 드물고 지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짓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의복이나 여름철의 침구 등 현재 사용하지 않는 가재도구들은 천막바깥에 비닐로 씌워서 세워놓았다.
우리가 찾아간 곳에는 짜이첸(翟鎭, 50세)과 류사(留霞, 49세)부부가 60여 마리의 순록을 키우며 살고 있었다. 남편인 짜이첸은 가족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부인의 할머니는 마리아 수어(??亞 索)라는 어원커족의 샤아먼이며 촌장 중 한사람이었다.
우리가 둘러본 근하의 원시부락 체험마을 전시관에는 류사의 할머니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녀의 할머니는 2000년에 91세로 사망하였지만 류사와는 판에 박은 듯 너무나 많이 닮아서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어원커족의 샤먼이 되는 과정은 매우 어렵다. 3년 동안 술을 마시지 않으면서 산속에서 수련을 마치는 소정의 과정을 거치고 4년째 되는 해에야 샤먼이 될 수 있는 자격이 되어 촌장을 계승할 수가 있다고 하는데 류사의 어머니인 발라제(巴拉傑, 82세)는 그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샤먼도 촌장도 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간호사와 회계사를 거쳐 퇴직하였고 여름철에는 이곳에서 류사를 도우며 살고 있으며 겨울철에는 철새처럼 화가인 아들이 살고 있는 해남도에 가서 살기 때문에 우리가 방문할 때에는 만날 수가 없었다.
천막주변에는 땔감으로 모아 놓은 나무들이 쌓여있었다. 류사부부가 순록들에게 콩지게미와 소금을 배합한 사료를 주려고 사료가 든 냄비를 두드리자 인근에 있던 순록들이 모여 있었다.
‘강할라기, 일브리깟, 막다피, 어르시퍼러, 우레샤 등등’ 애정이 서린 목소리로 그들의 이름을 부르자 순록들은 류사의 말을 알아듣는 듯 귀를 쫑긋하고 달려들어 다투어 사료를 받아먹었다. 그녀의 모습은 자식을 부르는 어머니의 모습과 같이 정겨워 보인다.
순록들은 일 년에 한번 대부분 한 마리씩 출산을 하는데 임신을 하면 방울을 달아주어서 특별 관리를 한다. 그래서 그런지 방울이 달린 어떤 순록은 털도 많이 빠지고 힘들어 보인다. 그래서 한 번 더 사료를 주었더니 달게 받아먹었다.
순록들은 산 속에서 야생으로 자란다. 그리고 소금이 필요할 때, 대부분 2~3일에 한번 정도 천막 주변으로 내려온다. 오늘은 짜이첸이 아침 일찍 순록을 찾으러 가서 데리고 내려온 것이다.
짜이첸은 “순록들은 필요한 소금을 섭취하였으니 산으로 올라갈 준비를 해요. 저녁이 되면 산으로 올라갑니다”라고 말하면서 천막 안으로 들어가자고 한다. 날씨는 매서웠다. 천막 안에는 침대와 가재도구 등이 들어서 있고 앞에는 장작난로가 피워져 있었다.
류사는 선반위에서 무엇을 꺼내어 주전자에 넣고 한참 있다가 한잔씩 따라 준다. 차 이름은 ‘잉상홍’. 어원커족들이 겨울철에 즐겨 마시는데 몸을 보호하는 기능이 있다고 한다.
짜이첸은 야생으로 잡은 새와 산토끼 고기를 난로의 철판위에서 구워주면서 별미라며 먹으라고 권한다. 수렵이 법으로 금지된 후 어원커족에게 남은 전통은 순록을 키우며 사는 것과 고기를 전통방법으로 굽는 것 뿐 이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천막 밖으로 나오자 순록들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순록을 보기 위해 짜이첸과 함께 길을 나섰다. 한참을 올라가자 순록의 소변자국과 함께 머물었던 자리가 보인다. 순록이 멀지 않는 곳에 있다고 한다.
짜이첸과 함께 시야가 트인 높은 곳에 올라서 보니 자작나무 숲 사이로 순록이 보인다. 손에 든 채찍을 휘두르자 딱딱 하는 상쾌한 소리와 함께 순록들의 그 자리에 멈춰 선다. 순록을 발견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했는데 발견하니까 참 기분이 좋다. 회초리 하나로 순록을 리드하는 멋진 모습, 야생 속에서 또 이 야생을 지배하는 인간의 지혜가 뛰어나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순록을 둘러보고 같이 식사를 하기로 했다. 식사 준비는 모두 짜이첸이 맡았다. 류사는 그저 쌀과 말린 버섯을 내주는 것 정도였으며 우리는 가져온 식량을 내어놓고 구경만 했다. 먼저 얼음을 깨고 채취한 얼음을 물지게로 져서 날랐다.
활활타는 장작난로에서 장만한 쇠고기 철판구이, 동두부를 넣은 동태찌개, 루진버섯 볶음, 흰 쌀밥은 빼주 반주와 한께 그야말로 성찬이었다. 류사는 이빨이 없어서 고기를 씹지 못했고 동 두부를 안주로 술을 마셨다.
우리는 그녀에게 어원커족의 전통노래를 주문했다. 그녀는 20년 넘게 한족들과 살아서 민족 언어를 잊어버렸다고 한다. 어설픈 발음으로 한족 노래를 부르는 그녀의 모습에서 사라져 가는 소수민족의 비애를 느꼈다.
짧은 시간이지만 이틀 동안 그들을 지켜본 소감은 그들이 정말 어렵고 힘들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주업이던 좋아하는 사냥은 법으로 금지되었고 유목생활이라는 것이 초원을 찾아다녀야 하기 때문에 흩어져 살아야한다. 혹한이기 때문에 같이 살고 있던 어머니까지도 해남도에 있는 아들한테로 갔다. 이 추운 날씨에 술 마시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친구가 찾아오면 많은 말을 하지만 두 부부만 있을 때 할 수 있는 말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안내자는 “오늘 하루 동안에 했던 말들을 둘이서는 한 달이 걸려도 반도 하지 못할 겁니다”라고 한다.
다음에 이곳을 찾았을 때 다시 이들을 만날 수 있을까? 아마도 마지막 어원커족의 모습이 아닐까? 돌아오는 길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