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원의 포토차이나] 조선족 ‘경상도마을’의 대보름
연길에서 백두산 가는 길에 만나는 첫 도시는 안도현 명월진이다. 명월진 시내에서 우측으로 나가는 길로 한참을 가다보면 명월구 회의를 기념하는 비석이 나오고 장흥향 소재지를 지나서 비포장도로를 조금 더 올라가면 오봉마을과 새마을이라고 부르는 신툰이 나온다. 이 새마을과 오봉마을은 1938년 3월25일 밀양의 40호와 합천의 60호가 이주하여 형성된 집단부락으로 출발했다.
이 마을은 이주 초기부터 농악으로 유명하였다. 1941년 만척(만주척식회사)은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흥농회를 통해서 조선인들에게 관?혼?상?제례를 위해 상여와 가마, 사모관대와 활옷 등 민속품과 더불어 농악놀이에 필요한 북이나 장구, 매구, 징, 꽹과리 등을 보급하였다. 당시 마을의 보도원이던 제국대학 출신 의사인 김평권은 농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경기도에서 남사당패 출신인 이기익 옹을 데려와 농악을 지도하였다. 그래서 만주국 창설 10주년을 기념하는 경축대회에서 동북삼성의 6개 민족이 참가한 ‘소수민족민속대회’에서 1등상을 수상하는 등 이 마을의 농악은 더욱 활성화되었다. 광복 후에도 이 마을의 농악은 계속되었고 마을 어른들의 영향을 받은 이범용, 강용운 옹 등은 어릴 때부터 따라다니면서 농악을 즐겼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농악 등 전통적인 민속은 타파되어야 할 구습이라고 하여 북과 꽹가리 등 민속 농악기구를 불태우고 금지하였는데 이범용은 자신이 사용하던 꽹과리를 천장에 숨겨놓고 문화혁명이 끝난 후 민족의 풍습이나 특성의 표현이 자유로워진 1974년 3월 8일 부녀절에 정주영, 정현주, 강영운 등과 함께 한판을 벌여 갈채를 받았다. 그 후. 북과 소고, 장구, 상모 등을 제작하거나 구입하여 농악대를 구성하였고 노인회를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현재는 전체 조선족 부락에 전파되어 조선족 전반에 걸쳐 농악무가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조선족이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 있는 이 마을은 지리적 여건으로 인하여 강한 추위를 동반한 겨울이 매우 길다. 논농사 위주의 이곳은 겨우 내내 할 일이 별로 없다. 그래서 전통적인 명절인 설날과 정월 대보름은 물론 부녀절이 있는 3월 초순까지는 여유가 많다. 통상 중국의 조선족들은 설날에는 가족단위의 행사를 하고 대보름에는 마을단위의 행사를 한다. 중국의 한족들 역시 춘절과 대보름은 큰 행사이기 때문에 양력 1월1일인 원단에서부터 명절이 이어져 대보름에 절정을 이룬다. 그리고 다양한 소수민족들이 함께 어울려 생활하기 때문에 여러 민족들이 함께하는 민속경연대회가 많다. 원단에서부터 대보름 사이에는 마을단위로 출연 준비에 분주하다. 새마을과 오봉마을도 매번 이러한 민속경연대회에 함께 참가하고 있으며 안도현에서는 1등을 도맡아놓고 수상하며 조선족의 성가를 높이고 있다.
필자는 이 마을과 인연이 있어서 여러 차례 마을을 방문하였는데 2000년 대보름에는 며칠을 마을에서 묵었다. 음력 정월 13일 새마을에서는 소를 잡고 아랫마을인 오봉에서는 이튿날 돼지를 잡는다. 원래 두 마을은 한마을에서 갈라져 나온 뿌리가 같은 마을이었는데 어떤 연유에서인지 둘로 나뉘어졌지만 친척이나 친구들도 많아서 한 마을같이 활동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14일에 음식을 장만하여 마을 잔치를 개최한다. 그것은 15일에 안도현에서 민속경연대회가 있는데 꼭 참석하라는 현의 독려 때문이다.
14일 저녁 필자는 인근에서 토속음식을 가장 잘 만든다는 강덕이 할머니 댁에 머물렀다. 그분은 새벽에 오곡밥을 짓고 나물 반찬을 해서 먼저 외양간에 가져가 소에게 먹였다. 의아해하는 필자에게 소가 어느 것을 먼저 먹는가에 따라서 그해의 농사에 대비하는 방편이라고 가르쳐주었다. 가족들은 집에서 담근 동동주로 귀밝이술을 마시고 오곡밥을 든든히 먹은 후 마을에서 대절한 버스에 올라 안도현에서 개최하는 민속공연에 참여하였다. 안도현에서는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16개 팀이 벌이는 민속공연에 참가하여 열연을 하였다. 저녁에는 폭죽을 터트리며 달집이 지어져있는 마을의 공터에 모여 농악장단과 춤사위가 어울리는 가운데 달이 뜨자 한해의 풍년을 빌면서 달집을 태웠다. 이어 안도현 새마을공산당지부 서기의 집에서 벌어진 뒤풀이 도중 안도현으로부터 1등을 축하한다는 전화를 받고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16일 아침 새마을의 주민은 경연대회 때문에 연기한 지신밟기를 위해서 아랫마을인 오봉마을로 이동을 해서 한해의 액을 모두 막아달라는 김태호 옹의 선소리에 맞추어 지신을 밟고 떡을 치고 풍악을 즐기며 마을의 화합을 다짐하였다.
고향을 떠나온 지 60년이 훨씬 넘고 이주민 1세대들은 대부분 사망한 상태다. 타민족들과 부대끼면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그들이 고향에서는 이미 잊혀지고 사라진 고유의 풍습을 간직하면서 살고 있는 모습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그 후로도 수차례 더 새마을을 찾았다. 2011년에는 대보름과 가까운 겨울에 마을을 방문하였다. 수십 년 만의 혹한이라면서 반갑게 맞아준 그들은, 농가주택개량사업으로 주택의 외형이 조금 바뀌었을 뿐 나머지는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조선인이 조선 사람을 보고 조선족이라 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들은 중국이 생기기전부터 그 땅-잊혀져가는 우리역사땅-을 일구고 사셨고, 누구보다 조선민의 전통을 잘 보존하고 있는 안타까운 유민입니다. 중국놈이나 일본놈들이 쓰는 말을 한국사람이 쓰면서도 마음이 이상해지지 않는다면 이미 반쯤 얼이 나간 얼간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