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원의 포토차이나] ‘송풍라월’의 전설을 아시나요
이도백하와 미인송
이도백하는 연길에서 백두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마지막 도시다. 연길이나 훈춘 등지에서 오는 장거리 버스의 종점이기도 하며 통화와 연결되는 열차의 정거장이 있어서 환인과 집안의 고구려 유적이나 독립운동의 현장을 둘러보고 오는 한국인들과 백두산을 연결하는 중간 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조선족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 어디서나?한국어로 된 간판을 볼 수 있다. 조선족 특유의 한식을 즐길 수 있어서 여행에 지친 한국인에게는?쉼터가 되기도 한다.
또 두만강이나 압록강의 발원지와 멀지 않아 강가 탐방이나 야생화 탐사 등의 목적을 가진 여행객들이 중간점검을 하며 필요한 준비를 하는 거점도시의 역할을 한다.
최근에는 백두산에서 흘러내려온 백하수를 이용해 중국에서는 표류(漂流)라고 부르는 래프팅을 즐기기도 한다. 열기구를 타고 백두산을 둘러 볼 수도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한국의 읍에 해당하는 진(鎭)인데 백두산 관광 성수기인 6~9월 가장 많은 여행객들이 붐빈다.
이도백하는 전체 면적의 94%가 삼림이다. 그 산림은 바로 백두산이기 때문에 백두산 속에 들어와 있는 도시라고 볼 수 있다.
장백낙엽송 등 경제적 가치가 높은 36종의 나무가 개발돼 있으며, 이도백하진에는 이러한 백두산의 산림을 채벌하여 원목으로 가공 판매하는 백하임업국이 있다. 이 백하임업국은 백두산 지역뿐만 아니라 길림성의 전 지역에서 처리 능력이 가장 큰 임업국이다. 전성기엔 연간 50만~70만㎥의 원목을 처리했다.
자연보호 등으로 규제가 심해진 지금도 연간 20만㎥의 나무를 판매하고 있는데 연간 5만~7만㎥를 겨우 처리하는 길림성 다른 임업국에 비하면 엄청난 규모에 속한다. 지금도 이도백하진 재정수입의 65%를 차지한다.
이렇게 나무를 벌채해 살아온 이도백하가 나무들을 보호하면서 관광도시로 거듭나고 있어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흥미로운 도시가 되고 있다.
이도백하의 보호수는 홍송왕 등 거수(巨樹)들을 비롯해 사계절 푸른색을 간직하고 있는 소나무의 일종인 장백송이다. 거수들은 수백 년의 수령들을 가진 신목(神木)이 대부분이지만 장백송은 보호구 안의 어린 나무들까지 포함된다. 그만큼 장백송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도백하의 미인송 보호지역에는 현재 8만 그루의 장백송이?있는데 그중 100년 이상 된 것이 350여 그루다. 가장 오래된 나무의 수령은 400년, 최대높이는 32.1m, 직경은 106cm이다.
그러나 장백송은 해발 700~1600m의 이도백하와 삼도백하의 작은 면적에 생장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으로 분포지역이 매우 적기 때문에 생태연구와 더불어 적극적인 보존노력이 필요하다.
장백송은 멀리서 보아도 훤칠하게 죽 뻗어있는 아름다운 모습 때문에 미인송(美人松)으로도 불린다.?재질이 단단해 목재로도 좋고, 잎이나 화분 등은 약재로 다양하게?사용된다.
백하임업국에서는 1973년부터 장백송을 관리 보호했고, 1984년에는 장백송림을 희귀나무구역으로 지정했다. 1999년에는 중국국무원의 비준을 거쳐 중국의 국가 1급 중점보호야생식물로 선정됐으며, 벌채나 채집이 금지돼 있다.
이도백하에서는 이러한 미인송의 송림을 송풍나월(松風蘿月)이라 부르는데, 다음과 같은 슬픈 사랑 이야기가 전설로?내려오기 때문이다.?미인송이 얼마나 많은?사랑을 받고 있는가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전설은?다음과 같다.
– 먼 옛날, 이곳에서는 송풍과 라월이라는 선남선녀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춘삼월 백하강 기슭에서 백년가약을 약속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을 부락장이 라월을 첩으로 들이겠다며 매파를 띄웠고 라월은 혼처가 있다며 부락장의 청을 거절하였다. 부락장은 크게 노하면서 송풍을 1년간 먼 지역으로 부역을 나가게 하였다.
송풍과 라월은 언약을 맺던 강가에서 만나 서로 변치 말자며 1년 후를 기약하였다. 송풍이 부역을 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부락장은 다시 매파를 내세워 애첩이 되기를 권했지만 라월의 마음은 돌릴 수가 없었다. 일년이 지나서 부역을 나간 마을의 다른 사람들은 돌아왔으나 송풍은 돌아오지 않았고 송풍이 성을 쌓다가 돌에 치어 죽었다는 풍문이 돌았다. 매파는 하루에도 두세 차례 찾아와서 부락장의 첩으로 들어가라고 권고하였다. 이 핑계 저 핑계로 석 달이나 끌었건만 송풍의 소식은 없었다.
졸개들은 “오늘은 애첩이 되겠느냐? 종이 되겠느냐? 애첩이 되겠다면 가마에 실어가고, 종이 되겠다면 묶어가겠다”며 겁박하였다.
라월은 “오늘밤에 송풍의 제를 지내고 내일 아침에 가겠으니 꽃가마를 가지고 와주세요”라고 하였다. 라월은 새 옷을 갈아입고 송풍과 언약을 맺고 이별하던 곳에 가서 바위 위에 물을 떠놓고 빌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달님께 비나이다. 우리의 연분이 저승에 가서라도 소원대로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월은 머리를 들고 달을 바라보다가 백하수에 몸을 던졌다.
3년 후 부역에서 해방된 송풍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고향은 그에게 기쁨대신 고통만 안겨주었다. 어머니도 돌아가셨고 라월이도 영원히 갔다.
그는 라월과 함께 거닐던 아름다운 백하수 강변을 걸었다. 마을사람들이 알려 준대로 송풍은 라월을 찾아갔다. 무덤 위에는 미인송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송풍은 그 미인송을 안고 쓰다듬으며 통곡하였다.
“나의 행복을 짓밟은 자를 행복하게 살게 할 수 없다”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마을로 돌아와서 말없이 부락장의 집에 불을 질렀다. 화광이 충천하자 송풍은 앙천대소하면서 라월의 묘지로 돌아왔다.
“라월이! 나의 라월이!” 하고 부르며 미인송을 끌어안던 송풍은 붉은 피를 토하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의 시체에서 뽀얀 안개가 일었다. 그 후부터 미인송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가지마다 열매를 맺었고 씨앗들은 바람을 타고 날아가서 수려한 수림을 형성했다. –
후일 이 고장 사람들은 이 미인송 숲을 송풍라월이라고 부르면서 송풍과 라월을 찬미하였다.